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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산행

[2020-04-10] 금정산 - 백수(白手乾達)의 첫나들이, 사십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금정산 - 백수(白手乾達)의 첫나들이, 사십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산행 일시] 2020.04.10(금) 12:30~15:45(3시간 15분)

[날       씨] 흐림

[산행 인원] 김창주·두점민, 조한근, 성봉현

[접근∙이탈] 서울(구리) → 부산 범어사 주차장 : 자차(조한근) / 원점회귀 산행

[산행 시간] 주차장(성보박물관, 12:30) → 사배고개(12:50) → 장군봉 갈림길(이정표[고당봉 1.9km], 13:15)

                 →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분기점(13:40) → 금정산 고당봉(14:13~14:20) → 북문(14:45~14:52)

                 → 금강암 입구(15:19) → 범어사 대웅전(15:31~15:38) → 주차장(성보박물관, 15:45)

[산행 지도] 1:50,000 양산(1:25,000  2013년 온맵 편집) / 국제신문사 금정산 등산 지도(2016-11)

 

[구글 어스]

2020-04-10_부산 금정산.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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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기록]

2020년 4월 1일, 사십여 년의 직장 생활을 끝내고 남들이 흔히 말하는 백수로 접어든 날이다. 하여 백수의 사전적 의미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백수건달(白手乾達)의 줄임말로 그 의미는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팬데믹(pandemic)으로 발전한 코로나19(COVID-19)로 인하여 3월 한 달 동안 재택근무를 하면서 적응된 것일까, 아직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정상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하루 그냥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창주로부터 부산 금정산과 가덕도 연대봉 산행을 하자고 연락이 온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고 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2박 3일의 여정에 동행을 하기로 하였다.

 

휴대폰의 전화 벨소리에 잠을 깨어 비몽사몽 간에 통화를 하는데 한근이 십여 분 후에 우리집에 도착한다고 한다. 아뿔사 전날 퇴직 전 근무했던 직원들과 간단히 소주 한잔 하였는데 기상 알람을 맞추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산행준비는 다 해놓아 부라나케 세면을 하고 집에서 나가 한근을 만나니 십여 분 이상을 기다린 듯하다. 신내동을 출발하여 구리에서 창주 부부와 만나 부산을 향해 출발하는데 시간은 어느새 아침 7시를 넘어서고 있다.

 

아침 출근시간과 겹쳐 중부고속도로 초입부터 거북이 걸음으로 시작하였지만 그나마 하남분기점을 통과하니 통행이 수월해진다. 휴대폰의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경로를 따라 휴게소를 두서너 번 들렀다가 범어사 입구에 도착하니 점심 때가 되었다. 범어사 초입에 있는 해장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범어사 매표소(주차요금)를 통과하여 성보박물관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가한 주차장에서 주차한 후 산행복장을 정리하고서 고당봉을 경유하는 원점회귀 산행을 시작한다(12:30).

 

[성보박물관] (http://www.beomeomuseum.org)

범어사 성보박물관은 2003년 3월26일 개관하여 범어사 및 범어사 말사의 불교문화재를 보관, 전시, 연구하는 불교문화재 전문 박물관입니다.

 

본 박물관은 범어사의 오랜 역사와 사회적 역할을 증명하듯 유물 종류와 양 또한 적지 않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다양한 전적들과 책판 및 불교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선찰대본산인 범어사의 성격에도 맞으며, 유서 깊은 유물을 전시하여 세밀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본 박물관은 국가지정문화재 5건(기탁 1건 포함) 및 70여건의 지정문화재를 소장, 관리하고 있으며 이외의 우수한 성보문화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관람안내

관람시간 : 오전 9:00 ~ 오후 5:00

관  람  료 : 무료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설·추석 연휴

문의전화 : 051-508-6139

 

주차장에서 성보박물관을 지나 설법전을 보면서 올라가는 범어사 내 도로는 계명암으로 분기되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정표[↑고당봉 3.1km ↓범어사 0.1km →계명봉 1.6km]와 국가지점번호[라마 4273 0017]판이 서 있다(12:39).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100m 밖에 되질 않는다고 하니 의아스럽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고당봉을 향해 계속 올라간다.

 

일반 승용차도 통행할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는 청련암 입구를 지나 삼거리를 만나는데 내원암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버리고 우측편 비포장 흙길을 따라 고당봉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 이어간다(12:45). 이정표에는 범어사에서 0.5km를 왔고 고당봉까지는 2.9km 남았다고 하는데 조금 전 이정표의 거리 표기와 합산이 틀리다.

 

일반 승용차도 통행이 가능할 것 같은 넓은 흙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국제신문사의 금정산 등산 안내도에 사배고개로 표기된 지점을 지나는데 낙동정맥이 고당봉에서 갑오봉을 거쳐 계명봉으로 오르기 전 고도를 떨어뜨리는 안부(고개)를 말하는 듯하다(12:50). 이정표[↑고당봉 2.4km ↓범어사 0.7km →(계명봉 / 장군봉 1.5km)]/국가지점번호[라마 4257 0058]판 우측 위 사송리 방향으로 정자가 보이는 고개인데 고당봉을 향하는 산길은 고갯마루가 아니라 계속 오름길을 유지하는 곳이다.

 

산책로 같은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장군봉 갈림길을 또 만나는데 아마도 주능선에 이르기 전 마지막 분기점일 것이다(13:15). 이정표↑고당봉 1.9km ↓범어사 1.8km →장군봉]와 국가지점번호[마마 4199 0041]판이 있는 곳이다.

 

앞쪽으로 보이는 하늘선을 그리는 낙동정맥을 향해 오르다 보니 특별한 것이 없는 산길에 뜬금없이 만개한 진달래꽃이 마중나온다. 벚꽃이 피는 시기에 남쪽임에도 불구하고 만개한 채 반겨주는 진달래꽃이 정신줄을 놓았나 보다. 맑게 갠 하늘을 배경으로 보았다면 꽤나 아름다웠을 텐데 하면서 산길을 오르다 보니 양산가산리마애여래입상 분기점을 만난다(13:40). 이정표를 보면 마애여래입상은 0.3km, 고당봉은 0.9km, 범어사는 2.8km 지점이라고 하는데 그냥 고당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높이 12m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은 금정산 정상 부근 화강암 절벽 위헤 새긴 거대한 마애불이다.

    머리 위헹는 상투를 올린 듯한 육게(肉髻)가 솟아 있으며 귀는 어깨 위까지 늘어져 있다. 얼굴은 네모졌는데 활모양의 눈썹과 가늘게 감은 눈, 콧방울이 불거진 큰 코, 꾹 다문 입 등은 토속적(土俗的)인 느낌을 주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벌어지고 각이 져서 건장해 보이며, 목에는 얕게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이나 가슴 아랫부분은 선각(선각)이 마멸(마멸)되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어깨 부근까지 올렸으며 왼손은 내린 듯하다.

    토속적인 얼굴 표현과 얕은 선각으로 표현된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좌측편으로 보이는 고당봉이 가까워질 수록 하늘과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까보다는 밝아져서 화사하게 보이는 진달래꽃이 반갑다. 발걸음을 붙드는 진달래꽃과의 짧은 눈맞춤을 끝내고 바로 위로 보이는 낙동정맥 능선에 올라선다(13:58). 이정표[←고당봉 0.3km →장군봉 2.5km ↑호포 4.5km ↓범어사 3.4km]와 국가지점번호[마라 4100 9956]판이 있는 곳으로 주변을 잠시 살펴보고서 좌측의 거대한 암릉군으로 이루어진 고당봉을 향해 다시 움직인다

 

여유로움을 주는 솔밭길을 걸어가다가 직진하는 금샘 가는 길 대신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잠시 짧은 오르막길을 올라서면 바위와 바위 사이로 길이 이어지는데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선 채 뒤돌아서서 낙동정맥 마루금을 눈으로 살펴본다. 2011년 3월 27일 낙동정맥 2구간(개금고개~지정고개) 산행 시 조금 전 범어사 갈림길을 지나 갑오봉으로 올라야 하는 것을 독도에 실패하면서 허리춤으로 돌아서 내려가 계당봉에 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 오르는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산길, 계단을 오르고 또 한번 더 나선형 계단을 올라서니 금정산의 정상인 고당봉이다(14:13). 금정산은 부산광역시(금정구)와 경상남도(양산시 동면)을 구분하는 시·도경계에 걸친 산으로 부산의 진산으로 불린다.

 

고당봉에서 북문 방향으로 내려가면 바로 만나는 '금정산 산신각 고모운신당(金井山山神閣 姑母雲神堂)' 아랫편에 있었던 금정산 고당봉의 안내판이 지금은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못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2011년 낙동정맥 산행 당시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금정산 고당봉(姑堂峰)]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1-1

고당봉(姑堂峰, 801.5m)은 금정산 주봉으로 부산 전경과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당봉은 선찰대본산인 범어사에서 산길을 따라 2.5km를 걸어 올라가면 1시간 30분이 걸리며 금정산성 북문에서 0.9km의 거리에 있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금정산의 최고봉이면서 금샘(金井)과의 불각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당봉의 이름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금정구에서는 1994년 8월 '금정산표석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이름 찾기 고증작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서 '고당봉(姑堂峰)'과 '고당봉(高幢峰)'의 두 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오랜 토론 끝에 "우리 나라의 모든 산에는 산신이 있고, 고려 때까지 내려오는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다. 금정산의 고당봉도 할미신이므로 할미 고(姑), 집 당(堂)의 고당봉(姑堂峰)이 옳다"는 우리나라 고유의 샤머니즘의 민속신앙에서 고당봉과 연계하는 학자 및 향토사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당봉(姑堂峰)으로 확정하고 표석비를 세웠다.

금정구청 문화공보과 (☎ 051-519-4081)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금정산 고당봉, 정상석이 바뀌었음에도 인지하지 못 한 채 흐린 날씨이지만 주위를 둘러본다. 우리나라의 남자라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당연히 준수해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였던 사십여 년 전의 수영만과 다대포가 눈에 선하고, 2010년 4월에 시작하였던 낙남정맥 산줄기가 낙동강과 만나는 고암나루터도 저기 어디쯤이겠거니 눈대중한다. 군복무로 31개월을 지냈고 그 후에도 회사 업무로 일 년에 한번씩 약 한 달간을 머물렀던 부산이기에 어쩌면 기억이 더 새롭기만 하다. 하지만 마냥 기억을 소환하면서 머무를 수 없기에 아쉽지만 고당봉에서 내려가기로 한다.

 

산행 전 계획은 고당봉에서 금곡동 방향으로 직진하여 중성을 경유, 의상봉과 원효봉을 지나 북문으로 내려설 예정이었지만 1.1km 떨어진 북문을 향해 고당샘으로 내려가는 좌측편 나무계단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14:20). 계단길은 바로 '금정산 산신각 고모운신당(金井山山神閣 姑母雲神堂)'을 만나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북문을 보면서 내려가는 계단길이 끝나는가 싶으면 금샘 이정표를 지나 고당샘이 나오는데 바닥에는 도룡농 알이 다수 있어 음용수로는 부적절한 상태이며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14:29).

 

[고당샘]

금정산 고당봉 정상아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이다. 샘물은 흐르고 흘러 북문인근에서 양 갈래로 나뉜다. 큰 갈래는 범어사를 지나 온천천을 이루고, 작은 갈래는 북문습지를 채우고 대천천으로 흘러드니 온천천, 대천천의 발원지이자 부산시민 삶의 원천이다. 현재 고당샘은 『금정산 고당봉 표석비건립 시민성금』으로 2017.6.30. 자연친화적으로 조성되었다.

 

일행에게 금샘을 가볼 것을 의사 타진하였지만 별로 호응이 없어 고당샘을 지나 금정산성을 좌측에 두고 진달래가 만개한 내리막길을 설렁설렁 내려가니 세심정이 화사한 벚꽃 아래 자리잡고 있는 '금정산 등산문화탐방지원센터'에 이른다(14:45). 아울러 고당봉에 세워져 있었던 원 정상석이 강화유리 상자 속에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상석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 정상석은 넓은 바위덩어리에 '고당봉 낙뢰 표석비 / 이 표석비는 1994.12.23. 금정산 고당봉 정상에 건립하여 사랑을 받아 왔으나 2016.8.1. 천둥번개를 동반한 집중호우 시 낙뢰로 파손되어 이곳에 옮겨 보존합니다. / 2016. 10 .26 / 고당봉표석비건립범시민추진위원회'라 음각된 대리석과 함께 세워져 있다. 아울러 주변에는 금정구청 문화공보과(051-519-4081)에서 세운 '金井의 문화유산' 안내문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소박한 석공의 솜씨처럼… - 금샘(나마)

금정산의 금샘은 솟아있는 바위 위 웅덩이에 물이 고여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석공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이 웅덩이는 풍화혈 중 하나인 나마(Gnamma)라고 합니다. 풍화혈은 암석의 작은 틈이나 오목한 곳에 빗물이 고이거나 그늘지면서 그 부분이 계속하여 풍화되어 커지며 생성되거나 혹은 물을ㄹ 많이 함유한 토양이 암석과 함께 오래 지하에 있다가 지표로 들어나 차별적으로 침식되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 중 바위의 표면에 만들어진 것을 나마라고 하며 보통 화강암에서 많이 형성됩니다.

나마의 어원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아보리진의 언어로서 '구멍'을 뜻합니다.

 

금샘[암상금정(巖上金井)]

고당봉 동쪽에 자리 잡은 바위 무리의 동남단쪽에 화강암이 돌출해 있는데 그 꼭대기에 있는 절묘한 우물을 금샘이라 한다. 이 우물은 하트 모양으로, 바위의 절리(수직 균열) 방향과 같이 남북으로 긴 모양이다. 화강암 속에 있던 다른 암석이 화강암을 빠져나간 뒤 빗물의 작용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범어사에는 "금샘에 물이 마르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을 면치 못한다."라는 말이 전하고 있어, 가뭄이 오면 금샘을 먼저 살펴보고 금샘 아래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금샘은 사방이 확 트여 경치가 맑고 아름다운 곳에 있으며, 그 둘레의 곡선미와 금빛 물결이 만들어 내는 광경은 불심의 오묘한 영험으로 조물주가 빚어 낸 예술품임을 짐착하게 한다. 또한 금샘은 범어사 대웅전과 대각선상에 있어 하늘과 통하는 지심(地心)의 혈맥이며 이 샘의 물은 생명의 정화수이다. 호국의 정기가 서린 자연 에너지가 충만한 성소(聖所)로 불심을 받드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금빛 물고기는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고당봉[고당귀운(姑母堂)]

해동에서 제일인 부산의 진산, 금정산을 빼고는 부산을 생각할 수 없고, 고당봉이 없는 금정산은 말할 수가 없다.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을 바라보고 있으면 봉긋한 연꽃송이처럼 보이는 봉머리가 걸려 있던 흰 구름이 흘러가면서 하늘문이 열리는 듯하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는 구름이 계속해서 모이고 흩어지기에 경치 역시 계속해서 변한다. 방금까지 보이던 까마득한 골짜기에 문득 안개구름이 불끈 솟아올라 어느새 골짜기를 덮고, 다시 고당봉까지 싸고돌면, 마치 바닷속에 떠 있던 섬이 흰 파도가 몰아치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그만, 하늘, 땅, 바다를 가리지 못하게 된다. 어느새 구름이 흩어지면 다시 산의 정상이 드러나 보이고 짙은 안갯속에 파묻혔던 골짜기도 드러나 보이는 이 기상천외한 자연의 조화는 금정산의 자랑거리이다.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에 이처럼 흰 구름이 걸려 있을 때에는 마치 천상의 세상을 연상케 한다는 뜻에서 이 광경을 '고당귀운'의 비경이라 한다.

 

고모당(姑母堂) 전설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에 밀양 사람인 박 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였다. 박 씨는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범어사의 화주보살이 되어 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신명을 바쳤다.어느덧 나이가 든 이 보상은 주지 스님께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 아래에 고모영신(姑母靈神)을 모시는 당집을 지어 고모제(姑母祭)를 지내 주면 범어사의 수호신이 되어 절을 돕고 지키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주지스님은 박 씨의 유언대로 박 씨 사후에 고당봉에 고모당을 지어 1년에 두 번(음역 1. 15., 5.5.)씩 고모제를 지냈는데 이후 범어사는 화엄 비보사찰로 사찰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병원에서 못 고치는 마음의 병도 이 고모당에 와서 빌면 씻은 듯이 나아 마음이 편안해지며, 하는 일도 잘 풀린다"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마무리하고 지척의 북문으로 이동하여 하산 채비를 하는 와중에도 2011년 낙동정맥 산행을 할 당시에 이곳 북문은 정비공사로 북적거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그 당시에는 주말에 날씨마져 좋아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고 북문도 정비 공사 중이라 시끌벅적하였던 날이었다. 국가지점번호[마라 4163 9887]판이 부착된 이정표가 이곳 북문부터 범어사까지는 1.7km 거리라고 알려주고 있는데 주말이 되기 전인 금요일의 오후라 하지만 한가롭다 못해 썰렁해 보이는 북문에서 고당봉을 다시 한번 더 보고 범어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14:52). 아울러 우리가 하산하는 범어사 가는 길이 부산 갈맷길 7-2코스라고 되어 있다.

 

금정산성

사적 제215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 높이 1.5~3m, 총 면적은 약 8.2㎢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는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현종 8)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산성의 기초는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건의로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이 성을 쌓았고,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중성(中城)을 새로 쌓았으며, 1808년(순조 8)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부터 복원을 하여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을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편리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금정산성 북문

사적 제215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1-1

범어사에서 서편으로 1.6km,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오르는 자리에 있다. 금정산성의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육축 상부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익공계 팔작지붕 단층문루이며, 성문의 폭은 정면 250cm이고 측면은 350cm이다. 성문 광장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라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 운동(1919년)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문을 통과하여 범어사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어 선 채 북문을 다시 한번 더 뒤돌아보고서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산책로 같은 흙길이 순탄하게 이어지는가 싶었는데 커다란 돌들이 널려 있는 너덜지대같은 느낌을 주는 돌계단길의 시작이다. 하산할 당시에는 몰랐지만 범어사에 도착할 때쯤 안내문을 만나면서 이 길이 '범어사 돌바다(암괴류)'라는 알게 된다.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에서 범어천을 따라 올라가면 금강암을 지나 금정산성 북문으로 가는 길까지 지천으로 널려있는 엄청난 바위천지를 만날 수 있다. 돌바다(암괴류)의 폭이 70m정도 되고 산사면 방향을 길이 2,500m 족히 넘어 보이는 바위들이 많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돌바다(암괴류)는 주로 바위가 물리적 화학작용에 의해 절리(바위에 갈라진 틈)를 따라 물이 스며들면 얼고 녹고하는 과정을 통하여 깨어지고 오랜 시간에 걸쳐 중력에 의해 주저앉으면서 만들어진다. 돌바다(암괴류) 밑으로 물이 흘러 대성암(大聖庵) 각해선림 구들장 아래로 숨어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선의 경지에 불심을 듣는다 해서 (금정 8경) 중 하나인 「대성은수(大聖隱水)」라 하였다.

 

내려가는 길에 뜬금없이 '범어사 은행나무' 안내문이 나오는가 싶으면 잠시 후 '범어사 0.9km / 북문 0.7km' 표지판도 보이는데(15:07) 이 분여 후 만나는 또 다른 이정표에는 '범어사 1.4km / (북문 1.1km)'라 표기되어 있으니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이정표들이다. 계속되는 자연석의 돌계단은 좌측편에 있는 금강암을 지나고 '범어사 돌바다(암괴류)', '금정산 제2등산로 안내도' 등의 안내판이 서 있는 대성암 입구에 이르러서야 끝난다(15:26).

 

이제 앞쪽의 기와를 얹어 놓은 돌담을 따라 내려가다가 작은 문을 통과하여 범어사 경내로 접어드니 기와지붕과 기와지붕 사이로 이어지는 돌담길은 고즈넉한 시골길을 닮았다. 돌담길이 끝나면서 좌측으로 '팔상∙독성∙나한전' 그리고 지장전이 나오고 이어 범어사 대웅전도 볼 수가 있다(15:31).

 

범어사(梵魚寺) (http://www.beomeo.kr)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때(678년),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 중 하나로 창건하였다.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며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설립된 사찰로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리운다.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선승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원효대사 · 표훈대덕 · 낭백선사 · 명학스님과 그 대에 경허선사 · 용성선사 · 성월선사 · 만해 한용운선사 · 동산선사 등 고승들이 수행 정진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50년대 동산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한국근대불교를 이끌었으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사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수행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충하였고, 사부대중의 수행정진과 화합을 바탕으로 2012년 11월 총림으로 지정되었다. 지유대종사를 초대방장으로 모시고 부산과 영남 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선찰대본산 금정총림’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 금정산 산마루에는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차 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속에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금샘'이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고기와 황금우물 그리고 산 이름을 따서 금정산 범어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

 

범어사 대웅전 보물 제434호

대웅전은절의 중심 건물이여, 석가모니부릉ㄹ 모신 곳이다. 대웅은 법화경에 나오는 말로, 큰 영웅, 곧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에는 가운데에 석가모불이, 양옆에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과 과거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이 모셔져 있다.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다포 맞배집이다.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록이 새겨진 기와를 보면 광해군 5년(1613) 묘전 화상이 지었고,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숙종 6년(1680) 조헌 스님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을 뒤로 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법성(法聲)의 소리를 내는 사중사물을 설치해 두는 종루를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간다(15:38).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연등이 길게 늘어진 계단길을 내려가 1989년에 중수한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어 2012년에 새로 지었다는 천왕문을 지난다. 그리고 바로 특이한 형태의 조계문(일주문)을 지나는데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조계문(曹溪門) 보물 제1461호(2006. 2. 7)

가람(伽藍) 진입로에 순차적으로 세운 삼문(三門) 중의 첫째 문으로 산문(山門)이라고도 하며.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서서 지붕을 받치므로 일주문(一柱門)이라고도 한다. 조계문(曹溪門)은 기둥 2개만으로 지지가 되는 여느 사찰의 일주문들과 달리 자연암반 위에 돌기둥 4개를 세워서 3칸을 형성했다. 한국 사찰에서는 그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자연과 조촤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광해군 6년(1614) 묘전(妙全)화상이 창건한 후 숙종 20년(1694)에 수리했으며, 숙종 44년(1718)에 돌기둥으로 교체해서 지금에 이른다. 대웅전(大雄殿)을 지은 조헌(祖軒)스님이 도대목(都大木)을 맡았던 까닭에 두 건물의 법식이 거의 동일하며, 조선 중기의 다포식(多包式) 건축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일주문에서 지척인 주차장에 도착하여 원점회귀의 금정산 고당봉 산행을 마무리한다(15:45). 무언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 산행이었지만 백수의 첫나들이로 찾은 부산 금정산, 한참 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추억의 시간이 되었다. 1981년 6월 어느 날 논산훈련소를 출발하여 깜깜한 새벽에 도착했던 수영만에서 처음 만난 부산의 바닷내음, 그리고 회사 업무로 다시 만났고 먼 옛날의 기억으로 사라질 즈음 낙동정맥 산행으로 또 만났던 다대포 해안 … 나에게는 추억이 어린 부산인데 그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을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산행하였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으랴. 2박 3일간의 나들이 중 첫날 여정을 끝내고 우리의 임시 숙소인 가덕도 우진펜션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범어사 주차장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