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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산행

[2012-11-03] 백암산(백암OP) - 가곡 '비목'의 배경이 된 비목(碑木)을 만나다

백암산(백암OP) - 가곡 '비목'의 배경이 된 비목(碑木)을 만나다


[산행일시] 2012. 11. 03(토) 10:15~15:18(5시간 03분)
                (산행시간 : 3시간 36분 / 휴식시간 : 1시간 27분)
[날      씨] 맑음/구름 조금
[산행인원] 김창주, 성봉현 / 다음카페 '좋은사람들' 41명 및 강원도권 90여 명
[위      치]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철원군 원동면
[접근방법] 사당동→화천군청/화천군청→군부대 정문 앞 : 다음카페 '좋은사람들' 전세버스
[복귀방법] 군부대 정문 앞→상천역 : 다음카페 '좋은사람들' 전세버스
[산행시간] 수색중대 정문 앞(10:15) → '흰바우길' 표시목(11:30~11:36) → 백암OP(12:32~13:40)
                → '흰바우길' 표시목(14:14~14:18) → 수색중대 정문 앞(15:18)

[산행지도]

 

[구글어스]

 

[산행후기]

다음카페 '좋은사람들'에 접속하였다가 일반인의 신분으로는 가기 힘든 산행지가 공지되었다.
선착순이라는 문구와 함께 한북정맥의 최북단 백암산이라 한다.
2명을 예약하고 군부대 출입에 필요한 개인정보를 비밀글로 적은 후 산행일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산행 당일 아침, 평생지기의 택배로 구리에 사는 친구집에 도착하고 다시금 택시로 복정역까지 이동한다.
성남 복정역에 예정시간을 조금 넘겨 도착한 버스에 십 여명의 산꾼들과 함께 승차하자
외곽순환고속도로를 거쳐 서울춘천고속도로로 올라서더니 화천군청에서 41명의 산꾼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강원권 버스 2대에서 많은 산꾼들이 더 내리니 휴일의 화천군청이 북적인다.


화천군청 관계자와의 협의가 끝난 것인지 버스에 다시금 승차하여 민통선을 향해 달려간다.
도로에 선을 그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쉽게 넘을 수 없는 민통선,
그 민통선을 넘어선 버스는 주파령 고갯마루를 넘고 칠성전망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제 비포장 길이 시작되면서 속도를 줄이더니 구불구불 몇 굽이 돌아 오늘의 산행기점에 도착한다.


군부대 관계자로부터 산행 시 주의사항을 듣고 기간병인 사병의 안내를 받으며 우르르 몰려가는 산꾼들,
그 산꾼들을 보면서 후미에서 출발한다(10:15).
졸졸졸 흐르는 작은 계류가 옆에 있는 것 같더니만 어느새 많은 산꾼들을 제치고 앞서가고 있는 중이다.


완만하던 군 작전도로가 알게모르게 조금씩 높아지는 듯 앞에 보이는 길이 눈높이로 다가선다.
전방지역이라 서울보다 추울지 알고 옷을 조금 두툼하게 입어서인가 등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해
배낭을 내려놓은 후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겉옷을 벗고 잠시 간식을 먹으면서 5분 여 휴식을 취한다.


앞쪽으로 보이는 능선을 향해 계속 이어지는 오름길이 왼쪽으로 틀어가는 곳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오른편으로 건물이 보이는 높은 구릉이 나도 보아달라 하는데 적근산이라고 한다.
길이 조금 더 가파르게 이어지고 이제 앞에는 십 여명의 산꾼들만이 가고 있을 뿐이다.
잠시 후 좌측에 '흰바우길'이라 새겨진 표시판이 있는 군부대 막사를 만난다(11:30).
백암OP까지 1.55km 남은 이곳에는 '6.25전쟁 격전지! 백암산 전투' 안내판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백암산 전투는 휴전을 앞둔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해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공산군의
보복차원에서 이루어진 금성지구전투의 핵심전투로 중공군의 공세시 백암산을 확보하고 반격을 개시하여
1953년 7월 19일 금성천 이남지역을 탈환하였다'고 적혀있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큰 고도차를 보이는 주능선을 향한 돌계단의 오름길로 발걸음을 옮긴다(11:36).
(산행기를 쓰면서 지도를 확인해보니 고도차가 약 360m에 이른다.)
백암OP까지 1.25km 남았다는 표지판이 있는 곳(11:55)에서 숨을 한 번 고른 후 다시 오른다(12:04).
중천의 태양에 달구어진 열기가 오름길로 데워진 체온와 합해져 이마에 땀을 맺히게 한다.
하늘선이 보이는 곳에 사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주능선이나 보다.
짧은 거리이지만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끝나고 목적지까지 0.65km 남았다고 한다(12:19).


우측 아랫편으로 보이는 산줄기들을 이어놓은 군사도로에서 분단의 아픔이 배어나오는 듯 하다.
이제 길은 좌측으로 90도 방향을 바꾸어 능선길을 걸어간다.
멀리 보이는 대성산과 적근산을 보면서 구릉을 좌측으로 돌아가니 드디어 목적지인 백암산이 보인다.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산길은 군부대 막사를 지나 '백암OP'라고 쓰인 표석을 만나고
그 윗편으로 가곡 비목의 배경이 된 비목(碑木)에 걸려있는 철모가 눈길을 끌어 당긴다.
서둘러 구릉에 올라서니 어느 이름 모르는 병사의 나무 십자가인 비목과 표석이 세워져 있다(12:32).


비목의 작사자인 한명희(韓明熙)교수는 1939년 충북 중원 출생으로 ROTC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었다.
화천 북방의 백암산 즉, 평화의 댐을 지나 북한강의 상류에 있는 지류인 금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 일대의 고지들에서 군생활을 하였으며 이곳 백암산 주변이 바로 가곡 비목의 배경이 되어
평화의 댐 옆에 비목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1987년 '신동아' 6월호에 비목이 만들어지게 된 자신의 군 복무지였던 백암산 주변의 분위기와 가사를
쓰게 된 경위를 '이름모를 碑木이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밝혔는데 이를 대강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백암산이나 북한강 일대의 산야가 6.25 전쟁 당시 대단한 격전지였다.
특히 금성천변의 확트인 개활지를 경계로 해서 이쪽의 백암산과 대성산, 저편의 김일성 고지나 오성산이
딱 버티고 있는 지형적 조건, 혹은 파로호의 구만리 발전소를 쟁취하려는 피아간의 군사적 전략 등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격전지가 아닐 수 없었다.


막사주변의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양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저기서 뼈가 나오고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이 톱날이 망가지며 파편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순찰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썩어빠진 화이버며 탄띠 조각이며
녹슬은 철모 등이 나딩굴고 있었다. 실로 몇 개 사단의 하고 많은 젊음이 죽어갔다는 기막힌 혈전의
현장을 똑똑히 목도한 셈이었다. 그후 어느날 나는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의 주인공이면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렸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다.
일체가 뜬 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처음 비목을 발표할 때는 가사의 생경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었는데 여기서 一無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 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해질녘,
나는 어느 잡초 우거진 산모퉁이를 돌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덤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 보나 후르칙칙한 이끼로 세월의 녹이 쌓이고
팻말인 듯 나딩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증언장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이야기가 여기쯤 다다르고 그때 그 시절의 비장했던 정감이 이쯤 설명되고
보면 비목같은 간단한 노래가사 하나쯤은 절로 엮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감성적 개연성을 십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정이 남달러서도 아니요, 오직 순수하고 티없는 정서의 소유자였다면 누구나가
그 같은 가사 하나쯤은 절로 빚어내고 절로 읊어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 그때 그 곳의 숨김없는 정황이었다.


그후 2년의 세월이 흐로고 TBC(동양방송국) 음악부 PD로 근무할 당시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 편을 의뢰받았으며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스치고 간 영상이 다름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덮인 돌무덤과 그 옆을 지켜섰던 새하얀 산목련이었다. 나는 이내 화약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산화한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갔다.

당시의 단편적인 정감들을 내 본연의 감수설으로 꿰어보는 작업이기에 아주 수월하게 엮어갔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이상은 '네이버 지식IN'에서 찾은 자료로 여기서 초연은 화약연기를 뜻하는 硝煙이며,
대원들과 함께 순찰길에서 잡은 궁노루 즉, 사향노루를 한 마리 잡아왔는데 그날부터 홀로 남은 짝인
암놈이 애타게 울어대니 몇일 밤을 그 잔인했던 살상의 회한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수정처럼 맑은 산간계곡에 소복한 내 누님 같은 새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그놈도 울고
나도 울고 온 산천이 오열했는데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이란 가사의 뒤안길에는
이같은 단장의 비감이 서려 있는 것이라 한단다.


바로 윗편에는 '백암OP 1158M'라고 쓰인 표시목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백암산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행기를 쓰면서 지도를 확인해 보니 백암산은 이곳이 아니라 올라왔던 방향으로 보인다.
소원표지기로 만든 태극기 모형물과 사방위 주요 산의 거리를 표시한 표지목의 방향을 둘러본다.
멀리 한북정맥에서 갈래친 화악지맥의 주인공인 화악산이 보이고
언젠가 올라보아야 할 한북정맥의 민통선 구간에 자리한 대성산과 적근산이 지척에서 손짓한다.
그리고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보면 멀리 북한강 상류에 있는 임남댐의 모습과
임남댐 건설을 하였던 북한 노동자들의 숙소 건물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
아울러 멀리 금강산까지 보인다는데 오늘은 날씨가 희뿌옇기만 하여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모두들 무리지어 점심을 먹고 있어 우리도 우측편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는다.
임남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이다.
북한에서 임남댐을 만들어 수공 위협하자 우리도 부랴부랴 만든 평화의 댐,
그 평화의 댐은 산줄기에 가로막혀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 가보고 싶은 곳이다.
어느날 그곳에 도착한다면 오늘의 백암OP가 생각나겠지.
창주가 차려온 보온도시락의 점심밥을 먹고 주변을 정리한 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간다(13:40).


주능선으로 걷다가 우측편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따라 군부대 막사가 있는 휜바우길 쉼터에 이르고(14:14)
후미를 기다리면서 잠시 쉬었다가 군작전도로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간다(14:18).
계곡능선의 군사도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왔던 길이라고 낯설지는 않아도 지겹다고 생각들 즈음
앞쪽 저 멀리 아침에 출발하였던 군부대 정문이 보인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정문에 도착하여 아무때나 올 수 없는 산행을 마친다(15:18).


군부대 내무반 건물로 들어가 간단히 땀을 씻고 나와 조금 더 기다리니 일행들 모두 다 내려왔나보다.
산행길을 열어준 군부대 관계자에게 성금과 축구공으로 고마움을 전달하는 마지막 행사가 끝나고
각자 아침에 타고왔던 차량에 승차하여 부대원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화천군청을 향하여 출발이다.


먼지를 일으키면서 앞서가는 버스를 따라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배경지인 동막골을 지나고
잠시 후 칠성전망대 갈림길에 이르니 다시금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이다.
주파령 고갯마루를 넘고 민통선 통제소를 지나 화천군 산양리의 5번 국도와 합류한다.


강원도 차량과 이별을 한 후 우리는 서울을 향해 춘천에 들어서는데 이곳에서 전철을 이용할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어영부영하다가 춘천역을 지나버리고 고속도로 대신 국도로 들어선 버스는 거북이 걸음이다.
가평을 지나 상천역 가기 전에 있는 에덴휴게소에서 휴식을 하고 출발한 버스에서
산행대장이 가다가 대성리역에서 정차할 예정이므로 바쁜 사람들은 전철을 이용하라 한다.
하여 우리는 교통신호에 걸린 틈을 이용하여 버스에서 내려 지척에 있는 상천역으로 걸어가
5분 여 기다린 후 도착한 상봉행 전철로 망우역에 수월하게 도착한다.


[산행사진]

 ▼ 산행 기점인 5763부대 수색중대의 정문 앞에 선 김창주(아차산)

 

 ▼ 부대 정문을 출발한 일행들

 

 ▼ 계곡을 따라 길은 이어지고 - 아마도 금성천의 지류인 듯

 

 ▼ 흐린 하늘의 태양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 계속되는 군 작전도로 -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흰바우산(백암산)???

 

 ▼ 선두그룹의 후미에서 진행하고 있는 병사(기간병)

 

 ▼ 멀리 뒷편으로 적근산이 보이고

 

 ▼ 중간 쉼터인 '흰바우길' 표시판이 있는 곳

 

 ▼ '흰바우길' 표시판

 

 ▼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곳 - '백암산 전투' 안내판

 

 ▼ 이제부터 다소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 백암산 주능선과 합류하는 곳

 

 ▼ 중앙으로 보이는 대성산과 우측편의 적근산

 

 ▼ 백암OP(무명용사의 비목이 있는 봉우리)

 

 ▼ '백암OP' 표석 위 우측으로 비목(碑木)이 보인다

 

 ▼ 백암OP - 표시목 좌측편의 봉우리가 '흰바우산(백암산, 1179.2m)'인 듯 하다

 

 ▼ 가곡 '비목(한명희(韓明熙) 작사, 장일남(張一男) 작곡)'의 배경이 된 어느 무명용사의 비목(碑木)

 

 ▼ 흰바우산 방향 - 올라온 길

 

 ▼ 멀리 보이는 대성산(한북정맥)과 적근산

 

 ▼ 그리고 한북화악지맥의 화악산도 보인다

 

 ▼ 소원표지기로 만들은 태극기 앞의 김창주

 

 ▼ 북한 방향의 조망 - 임남댐이 육안으로는 식별되었지만 사진에서는 흐릿한 날씨 때문에 보이질 않는다

 

 ▼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다가 만나는 중간 쉼터

 

 ▼ 산행 출발지점이었던 부대 정문에서 산행을 종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