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 산행

[2015-01-20] 북한산성 14성문 안내문

아래 내용은 2015.01.04(일) 북한산성 14성문 순례 산행을 하면서 각 성문의 안내판에 적힌 내용들을 옮긴 것이고,

수문지에 관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인용하였음.

 

 

▣ 북한산성(北漢山城)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2.7km이며 내부 면적은 6.2㎢(약 188만 평)에 달한다.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은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일찍부터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 도성의 배후에 산성을 쌓아 국난에 대비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축성은 1711년(숙종 37년)에야 이루어졌다. 이렇듯 긴 논의 과정과는 달리, 성벽을 쌓는 데에는 단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아서 당시 축성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성벽은 평지-산지-봉우리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다. 계곡부는 온전한 높이로 쌓았고, 지형이 가파른 곳은 1/2 혹은 1/4만 쌓거나 여장만 올린 곳도 있다. 봉우리 정상부는 성벽을 아예 쌓지 않았는데, 그 길이는 4.3km이다.
성벽에는 주 출입시설로 대문 6곳, 보조출입시설로 암문 8곳, 수문 2곳을 두었고, 성벽 바로 옆에는 병사들이 머무는 초소인 성랑 143곳이 있었다.
성 내부 시설로는 임금이 머무는 행궁,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았던 삼군문(훈련도감-금위영-이영청)의 주둔부대인 유영(留營) 3곳, 이들 유영의 군사지위소인 장대 3곳을 두었다. 또한 군향을 비축하였던 창고 7곳,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僧營寺刹) 13곳이 분산-배치되어 있었다.
성벽의 높이를 지형에 따라 달리한 점, 성문의 여장을 한 매의 돌로 만든 점, 옹성과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다른 산성과 구별되는 북한산성의 특징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시     대 : 1711년(숙종 37년)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은평구-성북구-강북구 일원
이 산성은 1711년(숙종 37년)에 북한산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격은 뒤 유사 시에 대비해 한양 외곽에 성을 쌓자는 논의가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산성이다. 당시 완성한 성곽의 길이는 7,620보(步), 즉 21리 60보이며, 지형에 따라 적절하게 축성방식을 달리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곽시설로는 군사 지휘소인 장대(將臺)를 세 곳(동장대-남장대-북장대)에 만들었고, 성문 6개소(북문-대동문-보국문-대성문-대남문-대서문), 암문 6개소, 수문 1개소를 두었다. 성을 쌓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문제로 삼았던 식수 문제는 99개소의 우물을 파서 해결했다. 저수지도 26개나 만들고, 8개소의 창고를 두었다. 성 안에는 승군(僧軍)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을 여러 곳에 두었는데, 승군 총섭이 머물던 중흥사는 규모가 136칸에 달했다. 1712년(숙종 38년)에는 상원봉 아래에 130칸 규모의 행궁과 140칸에 이르는 군창(軍倉)을 지었다. 근래 훼손되었던 대서문-대남문을 보수하였고, 대성문-대동문, 보국문-동장대 등은 다시 지었으며, 성곽과 여장 등도 보수-정비하였다.

 


▣ 서암문(西暗門)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이다. 암문은 비상 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였으며,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됐다. 주로 적의공격이 예상되는 취약한 지점에 설치하였다. 서암문도 창릉천에서 쉽게 오를 수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더,
서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를 마련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암문 출입구가 네모난 형태를 보이는데 서암문은 외관상 무지개의 홍예(虹蜺) 형태를 띠고 있다. 문 내부에는 문짝을 달았던 지도릿돌과 장군목이라는 빗장을 건너질렀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 있다.
서암문의 주변은 지형이 낮고 험하지 않아 취약지대에 속했다. 이를 감안해 다른 암문에 비해 성벽을 높게 쌍았다. 또한 성문과 연결된 성벽을 ㄱ자 모양으로 돌출시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서암문은 성내에서 생긴 시신(屍身)을 내보내는 문이라 해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다.


▣ 북문(北門)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의 해발 43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폭 들어간 형태를 보이는 안부(鞍部) 지점에 자리한다. 주변에 상운사와 훈련도감 유영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훈련도감 유영과 상운사에서 북문지역의 수비와 관리를 맡은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산성에는 대서문·대남문·대동문·대성문·중성문·북문 등의 6개의 대문이 있으며, 큰길은 '대서문-중성문-대남문·대성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였다. 대문 중 북문과 대동문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있는데, 이는 한양 도성과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문에서 북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던 것은 북문만이 '대(大)'자를 붙이지 않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지』(北漢誌, 1745년 간행)를 보면 북문에만 도로망이 연결돼 있지 않다.
성문은 석축기단은 육축부(陸築部), 그 위에 올린 문루(門樓), 출입을 위한 개구부(開口部),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문짝 등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북문에는 문루와 문짝이  없는 상태로 육축부와 개구부만이 남아 있다. 문루 자리에는 초석만이 있으며, 개구부에는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의 구명이 남아 있다.
북한산성의 대문이 완성된 때는 1711년(숙종 37년)인데, 30여 년 후에 간행된 『북한지』에는 북문의 문루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18세기 전기에 이미 문루가 없어졌으며,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북한산의 주봉(主峰)인 백운대(약 836m)와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 암문 중 하나인데, 일제강점기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암문은 비상 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백운봉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었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 용암문(龍岩門)
용암문은 북한산성의 대동문 북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용암봉 아래에 있어서 용암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암문은 일반 성문과 달리 은밀한 곳에 만들어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다. 암문은 그 모양이 홍예가 아닌 방형이라는 것이 그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용암문은 동암문인 보국문과 달리 성 내부 쪽을 홍예형으로 만들었다.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 대동문(大東門)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숙종 37년)에 지어졌다. 서울의 동북쪽 수유동과 우이동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문의 형식과 모습은 대남문이나 대성문과 같다. 그러나 홍예문은 이 문이 가장 크다. 하부의 홍예문은 통로로 사용되었으며 상부의 단층 문루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3년에 새로 복원하였는데 이때 홍예문 상부의 여장도 함께 복원하였다. 문루 바깥쪽에 낮은 담장 형식으로 쌓은 여장은 아군이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설치한 군사 시설이다.


▣ 보국문(輔國門)
보국문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보국문은 소동문 또는 동암문이라고도 한다. 암문은 평상 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이용되었으며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되었다. 암문은 돌로 만들었지만 홍예 형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1993년에 보국문 상부의 여장을 복원하였고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 대성문(大城門)
대성문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문의 형식과 규모는 대남문과 같다. 대성문은 형제봉 능선을 타고 서울의 북쪽 평창동과 정릉동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 단층 문루는 우진각 지붕 형태인데, 이는 지붕 네 면 모두에서 불화살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 대남문(大南門)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톨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 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청수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북한산의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로, 성 밖의 삼천사 쪽에서 성 안쪽의 중흥사에 이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 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부왕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출입구의 모양은 암문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각 형태가 아니라 외관상 무지개 모양의 홍예 형태를 띠고 있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부왕동암문 아래에는 원각사(圓覺寺)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원각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와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이었는데, 부왕동암문의 실질적인 방어와 수축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까닭에 부왕동암문은 원각문(圓覺門)으로도 불린다.


▣ 가사당암문(袈裟當暗門)
북한산의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채해 있다. 1711년(숙종 27년)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8개의 암문 중 하나로, 현재 백화사가 위치한 의상봉길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 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가사당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을 쌓아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가사당암문 아래에는 국녕사(國寧寺)가 자리잡고 있다.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수비-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이었는데, 가사당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암문은 국녕문(國寧門)으로도 불린다.


▣ 중성문(中城門)
북한산의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의 협곡에 쌓은 중성(重城)에 설치된 성문이다. 대서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지역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해 적의 공격에 취약한 구역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곳에 적의 공격을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차단성(遮斷城)인 중성을 쌓았다. 중성 안쪽은 북한산성의 내성(內性)에 해당되는데, 이 내성에 행궁-중흥사-상창 등의 주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중성문의 수비를 담당했던 군부대는 대서문과 대남문의 수비를 맡았던 어영청 유영이었다.
현재의 주엉문은 석축기단인 육축부, 그 위에 올려진 문루, 무지개 모양의 출입구인 홍예문을 갖춘 전형적인 대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예 양쪽에 문루의 배수시설인 누혈(漏穴)이 하나씩 설치돼 있다.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장군목을 걸쳤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 있다.
규모는 대서문보다 조금 작은 편이다. 문루는 1998년 복원했는데, 1958년에 복원한 대서문의 문루보다 40년이 늦어 복원기술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중성문 옆의 암반에 폭 2.1m, 높이 1.8m 규모의 작은 암문이 숨겨져 있다. 이 암문은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성 안에서 생긴 시신이 중성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 문을 통해 나간다고 해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렀다. 한편, 중성문 바로 옆을 흐르는 계곡에는 수문이 설치돼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 대서문(大西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성문 16곳 중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다. 1712년(숙종 38년)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 때, 이 대서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과거 성내에 마을이 있었을 당시엔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했던 성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문루는 1958년에 복원한 것으로 북한산성 문루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문루의 형태는 우진각지붕으로 문루의 일반적인 지붕 형태를 따르고 있다. 관영 건물이므로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강회로 마감하였다. 누각에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어 중수 내역을 전해 준다. 문루의 배수시설로 용머리 모양의 누혈(漏穴 : 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은 돌)을 성문 앞뒤로 두었다. 성 밖을 바라보는 용은 입을 벌려 누혈의 구실을 제대로 하게 하였으나, 성문 안쪽에 있는 용은 입을 다물고 있어 장식용으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문루 정면에는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한 장의 화강암으로 만든 점이 특징적이다. 북한산성의 대문 6곳 모두에는 이런 독특한 형식의 여장이 올려져 있다.
이 대서문을 통과하여 중성문을 거쳐 대남문에 이르는 길은 북한산성의 주요 간선도로였는데, 이 대문 3곳을 맡아서 수비·관리하였던 군부대는 어영청 유영이었다.


▣ 수문지(水門址)
대서문 북서쪽 근처 산성계곡에 있었던 폭 50척(15.5m)에 높이 16척(5m)인 큰 규모의 수문(水門)으로 1925년 8월 을축년 대홍수(乙丑年 大洪水) 때 성돌과 장대석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유실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계곡 양옆 산비탈에 남아 있는 성곽의 흔적만이 이 두 성곽 사이의 협곡에 웅장했던 수문(水門)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할 뿐이다.
※ 성곽의 배수를 위한 시설로 규모가 크고 문의 형식을 갖춘 경우, 수문(水門)이라고 하고 규모가 작은 것을 수구(水口)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