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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정맥 자료

[스크랩] 백두대간 지명 해설 #4(빼재~눌의산)

다음카페 '좌충우돌 백두대간 도전기(http://cafe.daum.net/baekdudaegan-clib)'에서 퍼온 글입니다.

원문 출처  http://cafe.daum.net/baekdudaegan-clib/91dv/21

 

 

 

백두대간 지명 해설 #4(빼재~눌의산)

[빼재] 920m
빼재(수령 또는 신풍령)에 세워져 있는 <백두대간 안내비> 적힌 빼재의 유래.


<빼재>는 삼국시대부터 각 국의 접경 지역이었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많은 민관군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고 임진왜란 시 이곳의 토착민들은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다.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에 널리게 됐다고 해서 “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며 뼈재가 경상도 방언으로 빼재가 되었다고 한다.


험준한 산길을 넘나들던 시절 고개를 넘던 사람들의 재물과 목숨을 빼앗아 죽은 사람의 뼈가 산을 이루어 뼈재요, 이 고개를 넘나들던 주민, 사냥꾼 혹은 산적들이 동물 및 가축들을 잡거나 약탈하곤 하면서 뼈를 버려 둔 곳이라 하여 뼈재


'빼재'는 '추풍령'을 본뜬 '신풍령'이라는 휴게소가 고개 아래쪽에 들어서면서 '신풍령'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나, 일제강점기에 고개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는 바람에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수령(秀嶺)」즉 빼어난 고개라는 뜻의 표지석이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옛 이름인 '빼재'로 불려지기를 원하고 있고 앞으로 이곳을 관통하여 뚫리는 터널 이름 또한 '빼재터널'로 불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수정봉] 1030m
아무런 표식이 없어 구분이 잘 안되고 편안한 등로를 이어가다 우측으로 휘돌아 나가게 되어 있다. 정상엔 잡목들로 전망이 가려져 있다.


[된새미기재]
호절골재에서 30분 남짓한 거리에 봉산리에서 올라오는 소로와 만나는 지점이다. 고개이기는 하지만 허리목은 아니다. 북쪽의 전북 무주는 지대가 높고 남쪽의 경남 거창은 지대가 훨씬 낮은 것이 확연하게 관찰된다. '큰(된) 새목 고개'이다. '된새목이재>된새모기재>된새미기재'로 변화했다.


[호절골재]
삼봉산과 1090봉 사이의 움푹 들어간 허리목이다. 삼거리에서 금봉암으로 넘어가는 소로가 교차한다. 남동쪽으로 45°에 가까운 경사면이고, 북서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계곡인데, 채소밭이 펼쳐져 있고 여러 개의 지류가 모여 삼거리 독가촌 마을 앞을 지난다. 고개에는 공터가 조성되어 있다. '막힌(絶) 계곡(谷)의 안쪽이 매우 넓다(浩)'는 뜻인데, 오늘날 모두 채소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니 기막힌 예언이 아닐 수 없다.


[덕유 삼봉산] 1254m
삼봉산은 거창의 진산이다. 거창 고읍지 및 조선환여승람 거창군 산천조에도 '삼봉산은 거창 북쪽 오십리에 있으며 무주로부터 대덕산 서쪽 가지라 적혀 있다. 해발 1,254m의 거봉으로 봉우리가 셋이라서 삼봉(三峰)이란 이름을 얻었다. 향적봉에서 바라 봤을 때 이 봉우리가 뚜렷한 '山'자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 가운데 어느 한 봉우리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산세를 지니고 있어 소금강이라 부르기도 하는 삼봉산은, 정상의 주봉을 중심으로 투구봉 노적봉 칠성봉 신선봉 석불바위 장군바위 칼바위 등으로 이름 붙은 자연산경과 금봉암(金鳳庵)이 어우러져, 소금강의 신비경을 연상케 한다. 거창과 무주를 경계 짓는 삼봉산은 이 같은 덕유연봉(德裕連峰)이 시작되는 첫 머리봉.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삼봉산을 '덕유원봉'이라 부르며 자긍심을 내보이기도 한다.


금봉암의 바위 샘물과 관련하여 천지인(天地人)을 우러른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인연이 깊다.


-> 문헌과 지도에는 1264m로 되어 있다


[금봉암]
금봉암은 고제면 봉산리 삼봉산(1,254m) 기슭에 있다. 금강은 본디 봉황새만이 깃드는 곳을 일컫는데 절이 황금빛 봉황의 이름을 갖고 자리 한다. 금봉암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절 터에 1905년 주상면 거기리에 살던 불심 깊은 청송 심씨가 세운 절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청송 심씨가 풍수가 잡아준 지금의 절 자리에서 원을 세우고 지금은 알 수 없는 가마솥 뚜껑 덮인 장수 샘물을 마셔가며 백일동안 단식기도를 드렸다 한다. 기도가 끝나던 날 이상하게도 어느 곳에서 날아 왔는지 알 수 없는 황금빛 새가 날아와 기도처를 세 번이나 돌고 난 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그 뒤 절을 짖고 금봉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이 절에는 이름난 세 개의 바위, 세 개의 용머리, 세 개의 바위샘이 있다. 요사체 뒤에 용바위, 용굴에서 내려와 얼굴을 쑥 내민 세 개의 용머리가 있는데 맨 윗쪽 용머리가 옛날 거창 부사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금봉암을 나한도량으로 영험스런 기도처로 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세 개의 샘이 자랑거리로 이름나 있다. 석불바위 뒤에 숨어 있는 샘을 피부병에 좋다 하며, 칼바위 위 바위굴 샘은 기도샘이고, 용바위 용굴샘은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 한다.


[소사고개] 680m
소사라는 마을 이름은 집집마다 마루바닥에 가는 모래가 깔리는데, 일년 내내 미풍이 불어 쌓여있는 모래가 모두 날아가 기쁜 마음으로 소사현(笑沙峴)으로 불려졌다 한다.


이 지역 일대는 정확한 대간 길의 독도가 까다로운데 그 이유는, 백두대간 대부분의 고개가 도(道)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나 소사고개(680m)는 경상남도 거창 땅이며 고갯마루에서 전라북도 무풍 방향으로 10여분 걸어내려간 '도계'(道界) 마을이 경계지점이다. 따라서 고개 이름을 전라도 쪽에서는 '도마치'라고도 부른다. 도계에서 '항상 농사가 잘 된다'는 무풍(茂豊)까지는 약 9km.


무풍면과 고제면의 경계지역이지만 고갯마루에 형성된 마을은 고제면 소사동이다. 무주구천동에서 거창으로 연결되는 1089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며, 매점 겸 식당이 한 군데 있다. 현재는 마을 이름을 따서 소사고개로 부르지만 원래의 이름은 경계선이라는 의미 의 '지경령'이다.


[초점산(삼도봉)] 1248m
전북과 경북, 경남의 도계를 이룬다. 군으로는 무주와 김천, 거창이다. 민주지산이 있는 삼도봉에서는 매년 3개 도 합동으로 화합행사가 열리지만 이곳에는 그런 행사가 없다. 서쪽으로 덕유산의 군봉들이 가까운 거리로 다가서 있다.


[대덕산] 1290m
대덕산은 이곳으로 살러 오는 사람은 모두 많은 재산을 모아 덕택을 입었다 하여 대덕산으로 불렸다 한다. 대덕산은 가야산을 향해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을 갈라놓은 삼도 분기점, 즉 해발1,250m의 초첨산을 옆에 둔 명산으로, 옛날에는 다락산, 다악산으로 불렸고 정상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하는 명산이다.


[덕산재] 644m
삼도봉과 대덕산 사이의 고개로 예전부터 전북과 경북의 서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였다. 지금은 무주에서 성주를 잇는 30번 국도가 지나간다. 고갯마루에는 휴게소와 주유소가 있다(2013년 현재는 폐점 상태임). 대덕면 덕산마을에 있는 고개라 하여 덕산재라고 한다. 일제 때 발행된 고지도에는 '주치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폐광터]
물한리의 황점, 핏들, 가래점 등 세 마을은 2백여년 전 제철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산위에 철마암(鐵馬岩)은 당시 일꾼들이 정초가 되면 산 위에다 철마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부근 계곡 일대에는 지금도 철광석이 더러 눈에 띄며, 폐광터도 보인다.


[선황당재]
약간 평평한 안부로 별다른 표식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부항령] 690m
무주 무풍 금평리 숙뱅이-김천 부항 어전리 가목을 넘나드는 재. 백두대간의 오래된 고갯마루인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부항현'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제는 고개의 구실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래로 삼도봉 터널이 뚫렸기 때문이다. 고갯마루 일대에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개 이름의 유래는 부항면 어전리에서 찾을 수 있다.


-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지명 유래


1. 어전(漁田)·어전리·어전골
임진왜란 때 허인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피난 와서 보니 들판의 형상이 마치 물고기처럼 생겼다 하여 어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 마을 이름이 없을 때 어떤 도인이 이 마을에 와서 보니 동네 서쪽의 작은 폭포수 아래에서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놀고 있어 어전이란 마을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어전재·어전령은 어전리 서쪽에 있는 고개로 경상북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신라군과 백제군이 싸웠던 재라 한다.


2. 가목·가매실·부항(釜項)
마을이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하다가 지금은 한자로 부항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가목이라 하는데, 이는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가목재에서 감내의 큰 줄기샘이 발원한다. 마을이름의 기원으로는 가마-가미-거무(거미)-거북의 의미 상통함으로써 농경사회에서의 숭배대상인 거북 신앙 곧 물신앙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도봉 터널]
부항면은 국토의 대동맥인 소백산맥의 줄기인 삼도봉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산이 높아 사방으로 나가는 길이 없어 면 관내에 들어오면 다시 들어왔던 길로 나가야만 다른 지역에 갈 수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1999년 12월 6일 삼도봉터널(391m : 경북 151m, 전북 240m) 개통으로 무주로 가는 길이 개통되어 영?호남인이 더욱더 가까워졌으며, 삼도봉 터널 앞 소공원은 영호남인의 화합과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교통량이 거의 없어 여름이면 500m 터널 양쪽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길이 없을 만큼 돗자리를 펴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속도를 줄이거나 함께 피서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백수리산] 1034m
정상에 헬기장이 있으며 넓은 공터로 사방이 나무들 우거져 있어 휴식장소로는 좋지만 조망하기엔 부적합하다.


[삼도봉]
삼도봉(三道峰)이란, 이름 그대로 3개의 도(道)에 걸쳐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남한에 삼도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몇 개나 될까? 모두 3개인데, 다 백두대간 줄기에 있다.


1. 흔히 초점산 정상으로 알려진 삼도봉(1,248.7m)으로 경북, 전남, 전북을 구분짓는다. 대화합기념탑이 위치한 민주지산 삼도봉의 남쪽 바로 이웃한 봉우리로 대덕산과 이어지는 산이다.


2. 지리산의 서부능선에 위치한 삼도봉(1,550m)은 경남, 하동군과 전남, 구례, 전북의 남원의 경계 지점에 솟아 있다. 반야봉 바로 아래 위치한 삼도봉의 원래 이름은 낫의 날을 닮아 낫날봉. 발음이 쉽지 않아 '날라리봉' '늴리리봉'으로 불리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삼도봉으로 새 이름을 부여 받았다.


3.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민주지산의 삼도봉으로,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전북 무주의 경계한 삼도봉(1,177m)이다. 경계를 가르는 도가 완전히 달라 "오리지널" 혹은 "혼또"라는 수식어가 흔히 붙는다. 이 삼도봉 정상에는 3개의 도시 주민들이 세운 대화합 기념탑이 있다. 국립공원 소백산과 속리산을 거쳐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향해 고도를 높이다가 3개도의 경계 지점에 이루러 우뚝 솟구쳐 오른 봉우리이다.


민주지산의 봉우리로 백두대간의 줄기를 이루는 삼도봉은 경북(김천), 전북(무주), 충북(영동)에 걸쳐 있다. 원래는 화전봉이었으나 3도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으로 불리게 됐다. 지리산의 삼도봉(날나리봉)이 전남북과 경남, 대덕산 전의 삼도봉(초점산)이 경남·북과 전북으로 불완전한 삼도인 것에 비해 온전히 도를 나누는 삼도봉이다. 정상에 1989년 10월 10일 세운 삼도봉 화합탑이 서 있는데, 삼도를 상징하는 거북과 용,검은 여의주로 만들었다. 지역 감정 타파를 위해 매년 10월 10일 삼도의 주민들이 모여 삼도화합제가 열리며, 삼도의 지방자치단체가 돌아가면서 주관한다.


이곳은 조선 태종 14년(1414)에 조선을 8도로 분할하면서 삼남의 분기점이 되었다 한다. 삼국시대엔 신라 백제가 격전을 치르며 세력균형을 유지했으나, 이후 역사가 흐르면서 삼도의 지리적·행정적 경계인 동시에 방언의 갈래길로 굳어졌다 한다.


[민주지산] 1241m
민주지산은 충북 영동,경북 김천,전북 무주등 3도에 걸쳐 있는 산으로 북으로 각호산, 석기봉,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8km의 주능선을 그리고 있다. 또한 10년 전 특전사 극기훈련 때 체온저하로 애석하게 수명의 병사가 사망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민주지산. 4음절로 되어 있는 특이한 이름과 '민주'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흡입력으로 인하여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민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동국여지승람>에는 민주지산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白雲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이름은 충청도 쪽에서 바라 봤을 때 산세가 민두름(밋밋)하다고 해서 민두름산이라 불리던 것이, 일제시대 지도를 제작할 때 민두름산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사 한자인 민주지산(岷周之山)으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 다른 설로는, 볼민(眠), 두루주(周). '두루두루 산을 볼 수 있는 산'이란 설이 있다. 민주지산 정상은 너무나 평이한 육산이다. 1,241m 높이의 산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덕유의 줄기를 시작으로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막히는 곳이 없다. 이 산은 주변의 산들이 높아서인지 석기봉, 삼도봉 너머의 산들도 전혀 가림이 없다. 덕유산. 마이산. 대둔산. 서대산. 속리산. 주흘산. 백화산. 황학산. 금오산. 가야산. 거망산. 그리고 그 사이의 크고 작은 이름 모를 산들의 물결. 어느 한 곳에 서서 이렇게 많은 산들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또 없을 것이다.


- 우리나라 산이름은 왜 백운산(白雲山)이 많을까


백두대간에 있는 함양의 백운산을 비롯해 전국에는 100여개의 백운산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한글학회가 발행한 '땅이름 사전'에만도 38개에 달한다.


白雲山은 보통 산이 높아 흰 구름이 늘 머물러 백운산으로 불리는데, 이는 단순히 한자를 풀이한 뜻이름이다. 白雲이란 이름은 한자의 음차에서 온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白)은 '밝'의 음차이고, '희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밝다'는 뜻과 직접 연관된다. 우리나라의 큰 산이나 명산에는 대개 白이나 朴이 붙는데, 이는 대부분 '밝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산 이름에 '밝다'는 뜻이 많은 것은, 옛사람들이 산을 인간세상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기봉] 1200m
민주지산에서 유일한 암봉. 쌀겨처럼 생겼다고 하여 쌀개봉이라 부른 데서 석기봉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삼도봉(1,176m)을 시작으로 민주지산, 각호산과 함께 웅장한 서북 능선을 이루는 산군(山群)에 속한다.


[삼마골재]
경상북도 김천시,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 등 3개 도가 만나는 화전봉(삼도봉) 북쪽 자락에 있는 고개다. 삼마골재 고갯마루는 화전봉으로부터 900m 떨어져 있다. 고개 서편은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이며, 김천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가 된다.


삼도봉에서 황악산 방면으로 내려가면 삼마골재에 이르고, 이 고갯마루에서 오른쪽 골짜기를 삼마골, 즉 삼막골(蔘幕谷)이라 하고, 왼쪽 골짜기를 미나리골이라 한다. 민주지산 주능선 북쪽 골짜기의 여러 물줄기가 미나미골(미니미골)에 합류해 황룡사 일원을 흘러가며 초강천의 상류를 이루고 있는 계곡을 물한계곡(物閑溪谷)이라 이른다.


[밀목령]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의 가래점마을과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대야리 대야동마을 간을 왕래하던 고갯길로, 지금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면목재라고도 불린다.


물한리는 맑은 물이 끝없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대야리 마을은 원래 천지동(天地洞)이었으나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시골동네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면서 정정하라고 어명을 내리자, 하늘천의 한일(一)과 따지의 흙토변(土)을 없애 대야리(동)가 되었다 한다.


물한리에서 부항면으로 넘어가는 또다른 고개로는 백두대간 상의 삼마골재가 있다.


[화주봉(석교산)] 1207m
여지도서에 황악산은 추풍령-괘방령에서 와서 서쪽으로 석교봉-삼도봉을 일구었다. 하여 화주봉을 석교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두령(질매재)] 730m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다.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하여 우두령(牛頭嶺)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두 이름이 별개인 양 둘 다 표기돼 있다.


[삼성산] 985m
동으로 진밭산, 동구지산, 덕대산 등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흥덕리의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


[여정봉] 1030m
숲으로 인하여 조망이 없다.


[바람재] 810m
바람이 불 때면 사람이 날아갈 듯 많이 분다 해서 바람재.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찾는 곳이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겨우 올라 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그들이었다. 발을 들여놓기 곤란할 만큼 망가진 데다 쓰레기투성이가 된 콘크리트 방카를 유산으로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산을 올라와 몇 시간씩 머물고 돌아간다고 한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쟁이 치러질 때면 봉우리에는 어김없이 미군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유고내전이 한창이던 때에는 아예 며칠씩 상주하기도 했다. 그들의 성능 좋은 무전기로 유럽까지 교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종주해 본 산꾼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남으로 우두령에서 북으로 궤방령까지 긴 산길에서 유일하게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목장까지 있어 산꾼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돼 온 탓이다. 해발 870m의 21만여평의 목장은 94년에 모습을 갖추었다. 겉으로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지만 목장에서 한국 축산업의 현주소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목장에는 한 마리의 소도 없다. 마지막 14마리의 소까지 팔아치우면서, 이제 목장 주인은 흑염소다.


[형제봉] 1020m
정상에 표지석도 없고 쉴만한 공간도 없는 능선길에 불과하다. 조망도 트이지 않고 다만 황악산 비로봉만 올려다 보인다. 잠시 내려섰다 올라서면 바로 황악산 정상이다. 두 개의 봉우리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어 형제봉이라 불리는 듯하다.


[황악산] 1111m
형제봉에서부터 황악산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하지만 부드럽다. 비록 '악(岳)' 자가 붙었긴 했지만 산세는 지극히 순한 육산이다. 그래서인지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돼 있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렀다고 하며 지도상에도 흔히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택리지 같은 문헌 및 직지사의 현판에 '황악산'으로 적혀 있는 걸 보면 황학산은 분명 오기인 듯하다.


굳이 '岳'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자면, 북에서부터 내려오는 대간의 줄기가 속리산에서부터 이렇다 할 산을 솟구치지 못하던 차에(속리산에서 황악산 사이에 1,000m가 넘는 산은 하나도 없다.) 1,111m나 되는 산을 만나고 보니 당연히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또한 이 산이름의 첫 글자인 황(黃)은 오방색(五方色) 중 가운데를 나타내는 색인데, 옛 사람들도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명명했을 것 같다. 실제로 황악산은 삼면 바다를 기준으로 봤을 때 한가운데에 있다.


[직지사]
황악산(黃岳山)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황악산에 자리잡은 직지사는 예로부터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 화상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아도 화상이 일선군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라 이름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백운봉]
황악산의 동봉(東峰)이자 직지사 백련암의 배후에 자리한다. 황악산의 일봉이지 독립 봉우리는 아니다. 경승지인 능여계곡이 가장 잘 관찰되는 위치에 있다. 이곳에서의 '백운'은 일반명사에 가까운 고유명사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운수봉] 680m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다.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이 대항면 운수리이므로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황악산 자락에 딸려 있는 조그만 봉우리인데 각종 이름에 차용된 것이 의아스럽다. 산 이름에 '물 수(水)'자를 쓰는 특이한 곳이다. 정상은 암장이다.


雲水峰.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여시골산] 620m
현재 대간꾼들 사이에 여시골산(620m)이라 불리는 산은 운수봉과 괘방령 사이의 대간 상에 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오른쪽 가지줄기의 385.4m를 여시골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여시골산이라는 이름은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된 듯한데, 과거 이 산에 여우가 많이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간 등마루 위 오름길의 시작 부분에 여우굴 같은 동굴이 있다.


[괘방령] 357m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을 잇는 977번 지방도로 위에 있는 고갯길.


이곳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괘방령이라 불리고 있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을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거는 '괘방(掛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고개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추측도 후대의 의미 부여이기가 쉽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 표기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掛榜이든 卦方이든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궤방'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오기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비록 이곳이 해발 300m의 낮은 고개이지만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의 정기가 잠시 숨을 고르다 황학산으로 다시 힘차게 뻗어 오르는 곳이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여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괘방령 산장]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던 산장 부부가 가정집으로 지으려다가 산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장 아닌 산장이 되었다 한다. 부부가 손수 3년여 공사 끝에 2007년 11월에 완공. 아직 대간길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산꾼들의 발걸음은 적은 편이지만 한번 다녀간 사람은 산장 부부의 넉넉한 인심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한다. 대간 상에 많은 산장이 있지만 대간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이용하기가 힘들지만 괘방령산장은 대간길과 접하고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다.


젊은 시절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였던 괘방령 산장 주인과 부인이 산다.


[가성산] 720m
높은 산은 아니지만 독립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동북쪽 경사면에 김천시립 공원묘원이 있는데 규모가 꽤 크다. 동쪽 발아래로 고속도로와 철도가 경쾌하게 뻗어 있다. 동쪽의 가성마을과 외가성마을에서 유래하는 봉우리로서 '가성(枷城)'은 화령권의 '작점'이나 '사기점'처럼 소규모의 진지가 있었던 곳이다.


[장군봉] 625m
가성산 바로 건너 산이지만 깊게 내려갔다 올라가야 한다. 가성산 정상을 넘으면 오른쪽으로 김천공원묘지로 가는 길과 왼쪽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몇 십미터 나가서 큰 바위를 왼쪽으로 돌아 밑으로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면 장군봉이고, 장군봉을 넘어서 계속 오르면 눌의산 직전 663m 봉우리다.


장군봉은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長君이라고 함.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신갈나무 무성한 부드러운 육산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음.


[눌의산] 743m
추풍령 남서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다. 직선거리로 2Km밖에 안 된다.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낮은 구릉지에는 포도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서쪽에서 접근하여 북쪽과 동쪽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향한다. 추풍령에서 벌판이나 다름없는 화령지역은 그 성질을 다하고 눌의산 이후로는 덕유산권이 시작된다. '어눌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결코 어눌한 모습이 아니다. '訥?山'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추풍령 뒤쪽에 자리잡은 산으로 등산인 들의 발길이 뜸해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이 산의 이름인 `눌의'는 한자어로 정의가 눌하다 혹은 더디다는 뜻이니 추풍령 영마루를 사이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양쪽 인정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을 뜻한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조망이 뛰어나다. 또한 옛날에는 요긴한 거점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라에 긴급을 다투거나 외적이 침범했을 때 활활 타는 봉화를 피워 올려 제몫의 역할을 다했을 눌의산의 늠름함이 살아 있다.


[추풍령] 221m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룸. 높이 221m.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氏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 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 군사적 요충지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 내륙 한양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 추풍령과 괘방령
옛날 과거길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가 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진군과 퇴각, 번다함과 적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