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구팀 합동 산행

[2025-10-26] 대구팀 합동 산행-37_수원 화성 : 추적추적 내리는 이 가을비는 누구의 눈물이려나

[대구팀 합동 산행-37]  수원 화성 : 추적추적 내리는 이 가을비는 누구의 눈물이려나

[탐방 일시]  2025.10.26(일) 10:22~14:57(4시간 35분 // 탐방 : 2시간 25분 / 휴식 : 2시간 10분)

[날       씨]  흐린 후 비 그리고 흐림

[탐방 인원]  9명(대구 참사랑산악회 7명, 서울팀 2명 / 이하 존칭 생략)

                  (대구팀) 차수근·박금선, 임상택, 기경환, 김형득, 차ㅇㅇ, 권재형,

                  (서울팀) 시인마뇽, 성봉현

[접       근]  신내동 → '잠실광역환승센터(지하)' → '창룡문,연무대' : 1680번/1007번 G-Bus(광역버스) 환승

[복       귀]  '창룡문,연무대' → '잠실광역환승센터(지하)' → 신내동 : 1007번/1680번 G-Bus(광역버스) 환승

[탐방 경로]  연무대 공영주차장(10:22) → 창룡문 → 연무대 → 장안문 → 화서문 → 서장대(팔달산) → 서남각루

                  → 팔달문 → 효원명가(생선구이 음식점, 점심 식사) → 봉돈(봉화대) → 연무대 공영주차장(14:57)

[구글 어스]

2025-10-26_대구팀_37_수원 화성.gpx
0.06MB

 

[수원 화성 지도]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https://www.swcf.or.kr)의 '수원화성지도'

 

[수원 화성]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의 수원화성 소개글

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 완공된 성입니다.

* 원침(園寢) : 왕세자나 세자빈 및 왕의 친척 등의 산소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행궁]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의 화성행궁 소개글

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힙니다.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탐방 기록]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날씨가 별로 안 좋을 듯하다. 신내동에서 1680번 G-Bus를 타고 '잠실광역환승센터'에서 하차, 1007번 G-Bus로 환승하여 수원화성 '창룡문,연무대' 정류장에 도착하니 두 시간 정도 소요되어 9시 30분이 되었다. 서울도 그랬지만 이곳 수원도 하늘에 구름이 많다.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우리나라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 기다리니 시인마뇽 고문님이 약속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셨는데 대구팀 버스는 소식이 없다. 그렇게 십여 분 이상 지나서 도착한 대구팀 버스에서 평소보다 적은 7명만 내린다. 서울팀 역시 범솥말 회장님이 다리 근육 파열로 걸을 수 없어 불참하여 두 명 뿐이니 전체 9명이다. 다들 사정이 있어 불참하였지만 다음 산행에서는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주차장에서 출발한다(10:22).

 

   주차장에서 차도를 건너 화성의 창룡문에 도착한다.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으로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 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은 형태이다. 이곳 창룡문에서 내부 탐방로를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장안문과 팔달문을 지나 다시 창룡문으로 복귀하는 코스를 걷기로 한다. 수원화성이 2002년에 복원되어서 그런지 성곽 내부 탐방로는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흙길이라면 좋았겠지만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곳인 만큼 이해가 된다. 동북공심돈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는 탐방로는 연무대(동장대)를 거쳐 연무초등학교 앞에 이르는데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오늘 날씨가 꾸물꾸물하지만 휴일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화성 성곽을 따라 걷고 있다. 우리도 복원된 성곽을 따라 걷다 보니 성곽 외부의 용연이 내려다보이는 동북각루에 도착했다. 성곽 내부는 시멘트 포장길인 반면 외곽으로 이어지는 길은 만개한 억새 등 풍광이 더 좋지만 외곽으로 탐방하는 것은 성곽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접근하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 그냥 내부로 돌기로 한다. 화성의 중간을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가 있는데 화홍문으로도 불리는 북수문을 지나 왕복 4차로의 정조로 위로 연결된 탐방로를 따라 장안문에 이른다.

 

   장안문은 화성의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라고 한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 옹성을 따라 장안문을 돌아나간 후 장안문을 뒤돌아보고서 북서적대의 홍이포를 살펴본다.

 

   앞쪽으로 보이는 팔달산(145.5m)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긴다.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먹구름에 덮여 있지만 아직 비는 내리질 않는다. 왼쪽 아래 도로변에 주차된 차량들을 보면서 북서포루와 북포루 그리고 서북공심돈을 지나 화성의 서쪽 문인 화서문에 도착한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는데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수원화성의 절반 정도도 못 왔지만 벌써 화성 4대문 중 세 개를 지나왔으니 이제 남쪽 문인 팔달문만 남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곳부터 서장대가 있는 팔달산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살짝 올라섰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완만해지는가 싶으면 서일치를 지나 계단길의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계단길이 끝나는 곳에 서노대와 서장대(화성장대)가 나오는데 팔달산 정상부이다.

 

   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로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는데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는 서노대는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이다.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검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 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깎아 마감하였다. 그리고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그 중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의 ‘화성장대(華城將臺)’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라 한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고도 한다.

 

   각진 건물들만 빼곡하게 들어선 수원화성의 내부를 내려다보고서 팔달문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을 이어간다. 서암문 앞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십여 분 쉬었다가 다시 성곽으로 올라오게 되어 효원의 종과 서포루는 못 보고 그냥 지나쳤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약하게 내리던 비가 제법 굵어져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내린다. 오후 비가 내린다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보았기에 준비해 온 우산을 시인마뇽 고문님과 함께 받쳐 쓰고 서남각루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되돌아나오는 중이다.

 

   서남각루는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하는데, 용도(甬道,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낸 길)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 있다. 지금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는데 만약에 이 곳을 막아 지키지 않아서 적군이 먼저 올라오게 한다면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보이게 된다고 한다. 비록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산 위의 3면에 돌로 성가퀴를 쌓았는데 두께가 4척이고 안의 높이 5척이며, 북쪽으로 서남암문의 바깥 쪽과 이어지게 했다.

 

   비가 내리는 돌계단 길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제법 경사진 내리막길은 팔달산을 다 내려간 팔달문 관광안내소가 있는 곳에서 끝난다. 앞쪽으로 건물들에 가려져 절반 정도만 보이는 팔달문 쪽으로 걸어간다. 서울 남대문처럼 대로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팔달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 팔달문시장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데 우리는 그 비를 맞으면서 걷는 중이다.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보물 제402호이다.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팔달문 주변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 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팔달문시장 입구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팔달문사거리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 점심을 먹기 위해 통닭골목으로 간다. 하지만 그렇게 걷다가 만난 생선구이 음식점인 효원명가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점심 때이지만 음식점들이 몰려있다 보니 복잡하지 않아 눈치 안 보고 식사를 한다고 한 것이 두어 시간 정도 머물렀나 보다. 그래서인가 굵게 내리던 비도 어느새 그쳤고 하늘이 약간 밝아진 듯하다. 팔달문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아침에 출발했던 창룡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수원천을 건너는 남수문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을 모르고 직진하여 지동교를 건너 왼쪽의 남수문 방향으로 올라간다. 남수문에서 이어지는 성곽으로 다시 올라 동남각루와 동삼치, 동남포루를 지나 다섯 개의 화두가 있는 봉돈(烽墩)을 만난다.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이다. 높게 쌓은 대(臺) 위에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가 다섯 개 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고 한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성곽 탐방로를 따라 지척에 있는 창룡문으로 걸어간다. 왼쪽의 주택들과 주차장을 감싸고 있는 화성의 성곽도 이제 끝나가고 있다. 봉돈에서 십이삼여 분 정도 걷다 보니 창룡문이 발 아래 보이지만 이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간다. 연무대 관광안내소를 향해 차도를 건너 도착한 연무대 공영주차장, 이곳에서 37차 대구팀 합동 산행을 끝낸다.

 

   오늘 이른 새벽부터 나서서 대구에서 멀리 수원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하신 대구참사랑산악회 회원님들, 고생 많았습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변변한 설명도 해 주질 못한 채 길 안내만 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당시에는 못 했는데 늦었지만 지금 글로써나마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내년 봄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