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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정맥 자료

[스크랩] 백두대간 지명 해설 #10(백봉령~약수산)

다음카페 '좌충우돌 백두대간 도전기(http://cafe.daum.net/baekdudaegan-clib)'에서 퍼온 글입니다.

원문 출처  http://cafe.daum.net/baekdudaegan-clib/91dv/27

 

 

 

백두대간 지명 해설 #10(백봉령~약수산)

 

[오대산] 五臺山 1,563.4m
원래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별칭으로, 신라시대 지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 공부했던 곳이다. 그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던 중 백두대간의 한가운데 있는 오대산을 보고 너무 흡사하여 오대산이란 이름을 지었다 한다.


오대산의 최고봉 비로봉이 비록 백두대간 마루금으로부터 6Km나 서편으로 벗어나 있지만 워낙 산세가 장중하기 때문에 선조들은 황병산, 덕유산, 민주지산 등과 마찬가지로 오대산도 '백두대간의 산'으로 치부해 왔다.


오대산은 한반도의 중심부 심장을 향해 서쪽으로 힘차게 벋은 양수기맥(兩水岐脈: 또는 한강기맥)과 정남으로 내리 뻗어 충주호 북안을 꾸미는 치악기맥(雉岳岐脈)의 산뿌리가 된다.


백두대간 마루금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비로봉, 효령봉을 거쳐 계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서쪽으로 힘차게 뻗어나가면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른다. 이 산줄기에는 계방산(1577m: 남한제5봉), 운두령(1089m), 태기산(1261m), 운무산(980m), 오음산(930m), 중원산(799m), 용문산(1157m), 유명산(864m), 청계산(658m)을 거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까지 먼 거리를 힘차게 달린다. 그러나 선조들은 산경표에 정맥(正脈)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내륙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요즈음 산악인들 사이에 이 산줄기에 정맥 이름은 아니더라도 기맥(岐脈)의 이름이라도 지어주자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혹자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는 분수령이니 '양수기맥(兩水岐脈)'이라 하자는 사람도 있고, 남, 북 한강을 이루는 산줄기이니 그냥 '한강기맥 (漢江岐脈)'이라 하자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오대산이 분기시킨 이 산줄기에 대한 산악인들의 애착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서울을 살찌우는 한강을 만들어 주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남, 북으로 가르고 또 합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의 깊고 그윽한 골짜기가 한강(남한강)을 발원(發源)하니 또한 물뿌리가 된다. 예로부터 오대산의 서대, 장령산(長嶺山: 지금의 효령봉) 아래서 솟아나는 우통수(于筒水)가 한강의 발원이라 전해져 왔다. 근래 와서는 태백의 금대봉(1418m)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이라는 주장이다. 1997년 조선일보사 발행 월간산 별책시리즈 '實戰백두대간종주산행'지도에 태백의 검룡소에 '한강발원지'라고 표기하고 있다.남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평창, 정선, 태백, 영월 일원의 수계를 보면 대체로 다섯 개의 큰 물줄기로 대별할 수 있다.


①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이 횡계/용평을 지나면서 멋진 래프팅코스를 만들어주면서 정선선 철도의 종점 구절리를 지나 아우라지에 이르고,


② 석병산에서 발원한 임계천이 청옥/두타산에서 발원한 골지천을 아우르고 역시 아루라지에서 송천을 만나 조양강이 되어 정선으로 향하고,


③ 오대산 효령봉 우통수에서 발원한 물이 수많은 오대산의 골자기의 물들을 모아 오대천이 되어 남류하여 정선 북쪽의 나전교 부근에서 조양강에 합수하고,


④ 태백의 금대봉 검용소에서 발원한 동대천이 서북류하여 정선읍내에서 조양강에 합수하고,


⑤ 태백의 함백산에서 발원한 동남천이 서북류하면서 고한/사북과 태백선 철도에서 정선선이 갈라지는 증산을 지나 정선읍 가수리에서 조양강에 합수하면서 강 이름은 댐 건설 문제를 놓고 국론까지 분열됐던 그 유명한 동강(東江)이 되어 서남류 하여 정선,평창, 영월 지경을 지나 영월 경내로 들어간다. 동강은 영월에서 서강을 만나 합수하면서 강 이름은 남한강(南漢江)이 되어 단양을 향해 남류한다.


- 오대, 이름 유래 관하여..
'오대(五臺)'란 이름이 의미는 두 가지에서 찾는다.


1. 비로봉(毘盧峰,1563m), 효령봉(1560m), 상왕봉(象王峰,1493m), 두로봉(頭爐峰,1421m), 동대산(東臺山,1433m) 다섯 봉우리가 각각 대(臺: 사방을 멀리 바라 볼 수 있게 솟아오른 곳)를 이루고 있어 오대라 하였다.


오대산의 제1봉 비로봉(毘盧峰) 이름의 '비로'는 불가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를 말한다.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에 살면서 그의 몸은 법계(法界)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내비추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라 한다.


또 문수보살은 여러 모습을 하고 있으나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 왼손에는 지혜의 그림이 있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 표준이다.


오대산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1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이른바 신라 보천태자의 '오대산 신앙'에서 제1봉을 비로자나불로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오대산 '오대'는'동대 만월산(滿月山), 남대 기린산(麒麟山), 서대 장령산(長嶺山), 북대 상왕산(象王山), 중대 풍로산(風爐山 또는 地爐山)'이라 기록하고 있고, 조선 숙종 연간에 학자 이만부 선생이 지은 지행록(地行錄)에 따르면 당시 오대산의 오대를 삼국유사와 유사하게 만월봉(滿月峯: 동대), 장령(長嶺: 서대), 기린봉(麒麟峯: 남대), 상왕봉(象王峯: 북대), 지로봉(地爐峯: 중대)이라고 한다.


2. '오대(五臺)'란 이름은 관음암(동대), 수정암(서대), 미륵암(북대), 지장암(남대), 사자암(중대)의 다섯 사찰에서 유래된 것이다. 오대산은 부드러운 육산(肉山)과 아람드리 노거수 (老巨樹)들이 이루는 수풀이 외면적 상징인 반면 내면적으로는 불교적 정신 유산이다. (沙月 李盛永선생이 오대산의 다섯봉우리를 산고수장의 산뿌리, 물뿌리, 불뿌리, 그리고 역사의 뿌리라고 하면서 엮은 것을 발췌 했다고 함.)


- 오대산과 '한강기맥'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은 백두대간 본줄기가 지나는 두로봉에서 6km쯤 서쪽으로 비껴나 있다. 하지만 오대산은 산 덩치가 워낙 큰 덕에 정상이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도 백두대간의 중요한 산으로 친다. 그런데 두로봉에서 비로봉을 거쳐 서쪽으로 향하는 산줄기가 백두대간 본줄기 못지 않게 아주 힘차다. 이 줄기는 계방산(1577m)으로 해서 태기산(1261m), 오음산(930m), 용문산(1157m) 같은 큰 산들을 세우고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그 세력을 다한다. 이렇게 굵직한 줄기면서 바다로 빠지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산경표」에서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이를 '한강기맥(漢江技脈)'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큰 산줄기로는 영산강의 북쪽 울타리인 '영산북기맥', 영산강의 남쪽 울타리 노릇을 하다가 탐진강의 서쪽 울타리가 된 후 땅끝까지 뻗은 '땅끝기맥', 압록강 지류들을 양분하는 '압록기맥'이 있다.


- 한강의 발원샘 우통수
서대의 우통수는 미수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신정, 신천, 또는 영천으로도 일컬어진 신령한 샘물로, 권근의 오대산 서대 수정암중창기 등에 의하면 여말선초 이후 한강의 발원샘이라 전하여 온다.


권근은 한강이 비록 여러 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것이지만, 우통수는 중령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아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우통수를 중국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옛 장강(양자강) 복판에 위치한 금산사(金山寺) 앞쪽 부용루에 있는 찻물로 유명한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 일명 중령수(中?水)와 비견하여 언급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명주 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에 보이는, 우통수에 대한 최초의 표기 우동수(于洞水)는 대산오만진신조의 같은 내용에 어조사 于 자를 쓰지 않고 그냥 동중수(洞中水) 또는 영동지수(靈洞之水)라 한 것으로 보아 본래는 서대 골짜기 속의 물, 또는 신령한 골짜기의 물이란 뜻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곧 于 자는 목적격 조사 '를'로 새길 수 있는 어조사였을 것이다.다시 말해 원문의 급우동수(汲于洞水)는 '우통(동)수를 길어'가 아니라 '동수(洞水·골짜기의 물)를 길어'의 의미이고, 복우동영수(服于洞靈水)는 '우통영수를 마셔'가 아니라 '동령수(洞靈水·골짜기의 신령한 물)를 마셔'의 의미라 하겠다.


뒤에 이 샘물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되면서 아래 상원사 일대의 샘물에 대하여 '웃동(윗동)의 물'로 언급하게 되면서 이를 소리옮김한 것으로 인식하고 于洞水로 끊어 읽게 되고, 다시 동음의 글자를 빌려 于筒水란 차자표기로 좀더 분명하고 고상한 표기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한다.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이라는 권근의 내용은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 강릉조에 거의 그대로 수용되고 좀더 보완되어 '(우통수는)금강연에 이르러 한수(한강)의 근원이 된다'고 언급한 이후 부동의 정설로 정착되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내용을 현대적 시각으로 종합해 보면 우통수는 한강의 발원샘이고, 금강연은 낙동강 발원지 황지와 같은 한강의 발원지(發源池·발원소)이고, 우통수가 있는 산봉우리 서대 장령봉은 한강의 발원지역(산)이라 하겠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위와 같은 전통적 한강 발원설은 1981년 이형석(한국하천연구소장)에 의해 한강의 최상 발원지역이 태백시 골지천 상류의 금대산 지역으로 문제가 제기된 후(월간山 1981년 5월호 참조) 김강산(태백문화원)과 전상호 교수(강원대) 등에 의해 좀더 발전적으로 조사 연구되어 지금은 발원지역을 태백시 백두대간 상에 자리한 금대산(금대봉·1,418m)으로, 발원샘을 금대산의 1351m봉에 자리한 제당굼샘으로, 발원지(발원소)를 태백시 창죽동의 창죽천 상류, 금대산 북쪽 금대봉골에 지리한 검룡소(儉龍沼)로 보고 있다(<한강의 발원지와 강원도> 강원개발연구원, 2000년 참조).


특히 태백시는 유로(流路)가 끊기는 제당굼샘, 또는 고목나무샘과 같은 발원샘 보다는 둘레 20여m에 석회암반을 뚫고 올라오면서 하루 5천여 톤 가량의 지하수를 용출하고 있는 검룡소를 황지와 같은 한강의 공식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다.


- 오대산 동식물분포
오대산 국립공원은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역과 다양한 계곡들로 비교적 인간의 간섭을 덜 받은 원시적 자영 상태가 유지되어 동물상이 풍부한 편이다. 이 지역에는 포유류 26종을 비롯해 조류 85종, 곤충류 1124종, 양서·파충류 21종, 담숙어류 31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포유류는 멧돼지를 비롯해 너구리, 오소리, 노루, 다람쥐, 청솔모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사향노루, 산양, 수달, 곰 및 하늘다람쥐가 있다.(사향노루, 수달은 절종위기에 있고, 곰과 산양은 절종된 것으로 보임) 희귀종으로는 삵, 대륙목도리담비, 고슴도치 등이 보호대책이 수립되지 않으면 절종위협에 처할 위기에 있으며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등은 이미 절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류는 13목 32과 85종.(텃새 33종, 여름새 44종, 겨울새 3종 및 통과새 5종) 우점종 - 동고비,어치, 노랑턱멧새, 박새, 곤줄박이, 쇠박새등 주로 텃새로 저지대에서 고지대에 까지 널리 분포한다. 촉새, 꼬까참새등의 통과새는 일시체류 한다. 곤충 은 18목 184과 1,124종이 확인되었다.


희귀 및 멸종위기종 - 홍줄나비, 바둑돌부전나비, 늦반딧불이, 장수하늘소 등이 있고, 감소추세종-사슴벌레, 풍뎅이, 하늘소등 대형 딱정벌레류 등이 있다. 양서·파충류를 보면 양서류 2목 5과 10종, 파충류 1목 2아목 3과 11종에 발견.


특정야생동물로 지정된 종- 한국특한종인 도룡뇽, 물두꺼비


희귀종- 실뱀, 멸종위기종인 구렁이, 대륙유혈목이.


감소추세종-능구렁이, 무자치, 살모사, 까치살모사 등.


담수어류는 총 10과 23속 28종


우리나라 고유종-금강모치, 쉬리, 가는물고기, 어름치, 배가사리, 참종개, 새코미꾸리,


미유기, 눈동자개, 퉁가리, 꺽지 등 11종.


희귀종-열목어, 둑중개.


오대산 지역의 식물상은 Ronald Good(1947)의 세계식물구계 구분에 의하면 일화식물구계 온대아구계의 한국구에 속하며 중부아구의 동편에 위치하여 전형적인 온대식생으로 볼 수 있다. 주요식생을 보면 냉온대성 식물이 대부분이며 낙엽활엽수종이 주요군집을 이루고 있다. 즉 신갈나무, 물푸레나무, 난티나무, 거제수나무, 까치박달을 위주로 한 낙엽활엽교목 수종과 싸리, 조릿대, 철쭉 등이 군집을 이룬다. 또한 주목, 분비나무 및 잣나무 등 침엽수종은 주로 산정(山頂)이나 능선 또는 계곡부에 군집을 이루고 있다. 오대산국립공원내 소산(所産) 관속식물은 기존 조사보고 자료를 종합한 결과 103과 404속 723종 212변종 16품종 총 860종류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식물중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종은 관중, 왕둥굴레, 도깨비부채, 큰용담 등 총 52종으로 이중 왕둥굴레는 CITTES규종으로 선정되어 있다.


오대산 일대는 식물이 우거지고, 각종 야생동물도 많은대. 주되고 유명한 것으로 식물로는 비로봉 일대의 눈축백나무, 주목나무군락, 두로봉에서 상왕봉에 이르는 사이의 철쭉, 금강초롱 등이다. 주목나무는 군락보호를 위해 '식생복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오대산 주목들은 수령 500년을 자랑하므로 답압과 우수에 의한 토양유실로 뿌리가 노출되는 등 생육장애를 겪고 있으니 출입을 삼가 달라는 호소성 경고판도 있고 주목에 관하나 설명문도 있다. 표고 700에서 2500m의 고산에 자생하고 있는 늘 푸른 큰키나무인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나무이며 그 뜻은 목질이 단단하고 썩지 않는 좋은 나무라는 뜻이다. 그 수피가 적갈색이라서 주목이라 부르며, 4월에 꽃이 피어 9~10월에 붉은 색의 열매가 달린다. 고대 희랍에서 주목으로 활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학명 Taxus는 taxon(활)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백복령] 百卜嶺 780m
백복령은 강릉, 동해, 정선,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석회암지대로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으로 복령(茯笭)이라 하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고 정선과 강릉을 가르는 마루금엔 '아리랑의 고장 정선'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또한 백복령은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
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
「정선엮음 아라리 중에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택리지』에는 백봉령(百福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이는 등 명확하지는 않다.


고갯길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백복령을 '뱃복이재'라고 부른다. 고갯마루에서 북쪽 산등성이에 올라가게 되면 둘레가 300-400m 쯤 되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가 여자들 배꼽에 뜸을 뜬 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뱃복이라 부른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을 옮기고 있다. '뱃복'은 배꼽의 옛말이다. 카르스트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의 움푹 파인 웅덩이가 신체의 배꼽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한자다. 한자로 쓰였던 지명은 앞에서 본 것처럼 제법 복잡 하지만 현재에 널리 쓰이는 백복령(白伏領)은 일제 때 지도 제작에 의해 고의든 실수든 잘못 기록되면서 전해 온 것이다. 백두대간보전회에서는 백복령(白福領) 보다는 주민 정서에서도 좋고 택리지에 근거가 있는 흰 봉황의 뜻인 백복령(白鳳領)으로 부르기를 홍보하고 있다.


[자병산] 紫屛山 최초 872.5m
자줏빛 병풍을 드리운 것 같이 아름다운 산이라 하여 자병산이라 했다(붉은 석회암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것). 또한 가물 때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고 한다.


백봉령에서 서쪽(임계) 방향의 도로를 조금 따라 내려가다가 보면 우측에 석회석 운반 차량 진입로가 있는데, 이 진입로에 설치된 광산차량 바퀴 세척시설의 뒤쪽에 임도가 개설 되어 있다. 이 임도를 따라 능선부로 바로 오르게 된다. 백두대간 산행은 백봉령에서 삽당령까지를 1개구간으로 하는데, '89년도까지만 해도 백봉령에서 자병산(872.5m)으로 올라서 능선을 따라 생계령, 고병(뱅)이재, 석병산, 두리봉을 거쳐 삽당령까지였으나 이 후에 석병산이 석회석 채광지로 전략하여 이 산은 전체가 없어지고 출입이 불가하여 지금은 자병산을 거치지 않고 바로 능선부로 올라서 생계령으로 간다.


산 위로 345kVA 고압선이 지나고 있다.


'보라빛 병풍'이란 의미의 자병산은 수려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나 '85년부터 국내외 시멘트회사들이 석회석 채석을 시작하며 산 정상부를 완전히 잘라내고 있고 채석이 완료되면 727m로 낮아질 것이라 한다


[생계령] 生溪嶺 640m
생계령은 주위에 도토리 나무가 많아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도토리 열매를 채취하던 곳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옥계면 산계리 사람들이 정선 임계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었던 고개로 산계령이라고도 한다. 산계리와 임계면을 잇는 길로, 왼쪽길은 정선군 임계면 방향의 큰피원으로 내려서는 길이고 오른쪽 희미한 소로는 강릉시 옥계면 성황뎅이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고개 정상에 주막집이 있었다고 한다.


[등갈산]


[민둥산]


[고병이재] 골뱅이재
강릉 산계리와 정선 임계리를 동서로 잇는 고개.


석화동굴(石花洞窟)은 강릉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동굴로 절골에 있어 절골굴이라고도 한다. 만덕봉·두리봉·석병산 일대는 약 10만 년 전 고생대에 생성된 석회암지대로 곳곳에 많은 석회동굴이 발달해 있는데,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총연장 1,400m에 이르는 거대한 동굴이라 한다.


- 강릉 서대굴
석병산 석회암층(石屛山石灰岩層) 내에 형성된 수직동굴(垂直洞窟)이다. 일명 '범록굴'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기념물 제36호이다. 주굴의 길이는 약 800m이고, 총 연장은 1,500m이다.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석병산 중복벼랑에 위치한다.


서대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로, 약 250m까지는 탐사되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동굴은 세로로 땅 속 깊이 뻗어 있으며 주변의 동대굴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동굴 안에는 작은 공간들이 발달해 있으며 옆면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그리고 꽃모양의 석화(石花) 등이 둘러싸여 있어 매우 아름답다. 서대굴이 위치하고 있는 산계리 지역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들이 모여 있는 동굴지대로서 동굴들의 형태가 모두 같다. 강릉 서대굴은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석병산] 石屛山 1055m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위치.


석병산은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끼고 남하하여 오대산과 황병산을 일구고 청옥산 두타산으로 뻗어 내려가 강릉시 왕산면에 안착한 산이다.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아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석병(石屛)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정상에 서면 강릉시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찍이 동해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광경이 일품이다.


주위에 만덕봉(萬德峰:1,035 m) ·대화실산(大花實山:1,010 m) ·노추산(魯鄒山:1,322 m) 등이 솟아 있다. 동쪽과 북쪽의 급사면에서는 주수천(珠樹川)의 지류가 발원하고, 서쪽의 완사면에서는 임계천의 지류가 발원한다. 남동쪽 비탈면에 옥계석화동굴이 있고, 생계령 기슭에는 임계 카르스트지형이 있다. 서쪽 기슭으로는 강릉~태백 국도가, 남쪽 기슭으로는 정선~동해 국도가 각각 지난다.


석병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절골, 황지미골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산은 석회암으로 형성되어 석화동굴, 서대굴 등 곳곳에 동굴들이 산재해 있다. 석병산을 일월봉이라고도 부르며, 정상부 우측의 바위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리어 있는데, 일월봉의 명칭을 따서 '일월문'이라고 한다. 옥계면 산계리의 절골 산비탈의 석화동굴은 '80년도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그동안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폐쇄하였다. 산 전체가 석회석을 이루고 있어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땅이 내려앉아 있는 함몰지를 여러 곳 발견할 수가 있다.


돌리네, 일명 쇠곳. 돌리네(Doline)는 빗물이나 지하수에 의해 용해되거나 지반의 함몰로 생간 우묵한 타원형의 지형이다. 이곳의 토양은 붉은 색을 띄는데 이는 석회암에서 탄산칼슘이 용해된 후 철 등 불순물이 남아 산화된 것으로 이러한 토양을 테라로사라 한다.


* 돌리네 : 석회암 지대에서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물에 녹으면서 깔때기 모양으로 패인 웅덩이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와지 안에서 경작할 수 있는 크기를 돌리네라 부른다. 테라로사라 불리는 토양이 발달하며, 돌리네가 연결된 경우 우발레라 한다.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틈으로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빗물이 스며들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녹아서 깔때기 모양 또는 작은 양념절구 모양의 오목하게 패인 웅덩이를 형성한다. 크기는 지름 1m 내외에서 100m에 이르는 등 다양하나, 최근의 국제적인 정의(定義)에 따르면 그 와지 저면(底面)에서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이 발달할 정도의 크기를 돌리네라고 하기로 하였다. 돌리네의 저면에는 테라로사(terra rossa)라고 불리는 토양이 발달된 곳이 많으며,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또한 돌리네가 더욱 용식(溶蝕)되어 인접된 돌리네와 연결되어 좁고 긴 와지를 이루는 경우를 우발레(uvale)라고 한다. 아드리아해(海) 동안의 카르스트 지방,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 아키요시다이[秋吉臺]가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의 충북 단양(丹陽) 일대에도 매포(梅浦)를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 석병산 일월문
맞은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와 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석병산 일월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추면 장관이라고 한다.


[임계]
임계는 인천에서 원주, 정선, 동해로 가는 42번 국도와 부산에서 경주, 안동, 태백, 강릉으로 가는 35번 국도가 만나는 곳으로, 임계장이 유명했다고 한다. 임계장은 예부터 어물이 싼 것으로 유명한데, 어물을 트럭에 싣고 들어 왔다가 더 들어갈 데가 없어 여기서 싸구려로 다 팔아 치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 임계 카르스트 지형
삽당령에서부터 마루금 왼쪽은 깊은 계곡, 오른쪽은 완만한 지형의 카르스트지형이 계속되는데 정선군 임계면의 지명을 따서 '임계카르스트지형' 이라 한다. 카르스트지형('돌리네'지역을 현지 사투리로 '쇠곳'이라 한다)은 빗물이 석회암을 용해하여 지하에 대규모 석회동굴을 만들기도 하고, 함몰지를 만들거나 지하에 하천이 흐르게 되는 구조다.


[두리봉] 斗里峰 1033mm
국토지리정보원과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 '두리봉(頭理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는 다르다. '두리'는 '둥글둥글하다'는 순 우리말로 '둥근 모습을 한 봉우리'다. 한자어 표기는 우리말 두리봉을 음차한 것에 불과하다.


두리봉 또는 두위봉(斗圍峯)으로 두리뭉실해서 두리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삽당령] 삽답령 揷唐嶺 680m
삽당령은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와 송현리의 분수령으로, 이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넘었으며 정상에 오르면 짚고 왔던 지팡이를 버리고(꽂아 놓고) 갔다 하여 '꽂을 삽(揷)'자를 써 삽답령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유래는 정상에서 북으로는 대기(大基)로 가는 길과 서쪽으로는 고단(高丹)가는 길로 세 갈래로 갈라지는 삼지창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이 고개는 강희 54년(숙종41년)인 1715년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府) 서쪽 60리 정선으로 가는 길'이라 기록되어 있다. 삽당령은 강릉을 적시고 동해로 흘러드는 강릉 남대천, 그리고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으로 몸을 섞는 송현천의 발원지기도 하다.


[들미재] 810m
동쪽 아래에 위치한 '들미골' 마을에서 유래가 찾아진다. 들미는 '들(野 )의 꼬리(尾)', 즉 '개활지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는 외진 곳'이라는 의미다.


들미골과 용수골(대용수동)을 넘나들던 재. 농기구나 그릇 또는 가구의 무늬로 쓰이는 들미나무가 많아 들미재라 부른다.


[석두봉] 石頭峰 982m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위치.


백두대간을 종주 해본 이들은 닭목재와 삽당령 구간에 위치한 석두봉을 수박 겉핥기로 지나친 적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석두봉은 강원도 오지 중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이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하면 '왕따 산'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식수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 물을 말통으로 지고 다녔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어느 구간보다 물이 풍부한 곳이므로 그럴 필요는 없다. 물은 마루금 안부에서 가까운 서남쪽에서 구할 수 있는데 가뭄에도 가능하다. 석두봉 정상은 이름 그대로 바위로 되었고 쌍이다. 동쪽 봉우리 보다 조금 낮은 서쪽 봉우리는 얼룩무늬 바위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마루금을 축으로 동쪽과 북쪽은 급경사를 이뤘고 남과 서쪽은 해발 800미터의 평평한 분지로 작은터, 가르쟁이, 솜솥밭, 대용수동을 거느리고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씨감자와 당근을 해갈이 하고 있다.


[화란봉] 花蘭峰 1069.1m
화란봉은 이름 그대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화관이 정상을 중심으로 겹겹이 에워싼 형국이 마치 꽃잎 같다고 해서 얻은 지명이다. 산행기점인 벌마을에는 용수골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에 이무기가 하늘로 오르다 힘이 부쳐 떨어진 곳이라 한다. 지금도 그때 자국이 용수골 너럭 바위에 남아 있다고 한다. 화란봉에선 닭목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란봉 주위에는 기암괴석과 몇 아름 되는 노송들이 바위 틈새에서 우람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된다.


[닭목령] 706m
강릉과 임계를 잇는 2차선 포장도로가 이 고개를 지난다. 고갯마루 북쪽의 왕산리엔 닭목골, 남쪽의 대기리엔 '닭목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닭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수가들은 여기의 지세를 '금계포란형'의 길지로 보았는데, 이 부근이 닭의 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닭목이라는 지명을 얻은 것이다. 고갯마루엔 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고루포기산] 1238.3m
강원 평창군 도암면 수하리와 강릉시 왕산면 고루포기 마을 사이에 있는 산. 주변의 발왕산, 제왕산, 능경봉의 명성에 가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았던 산이다.


고로쇠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예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나 기록은 전무하다.


태백산맥의 지맥인 해안 산맥에 딸린 산으로, 북서쪽의 빗면은 한때 대관령 스키장이 있었던 곳이다. 부근의 횡계리 일대는 평탄면을 이룬다. 서쪽에는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松川)이 감입곡류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 하안단구를 이룬다. 북동쪽 빗면으로 흐르는 수계는 왕산면 왕산리에서 강릉 남대천(南大川)의 지류로 흘러든다.


- 고랭지 채소 관련하여..
이곳은 태백 매봉산의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 삼척 숙암리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와 함께 '백두대간 3대 고랭지채소재배단지'에 속한다. 그러나 하천 수질 오염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고랭지 채소밭에서 흘러들어오는 농약과 퇴비, 토사 등.. 비내린 후 하천에 고랭지채소밭의 토사가 섞인 흙탕물이 내려와 쌓이면 물고기 알이 호흡을 제대로 못해 썩는다. 그래서 현대판 화전이라 불린다.


[횡계치]
용평스키장과 대관령목장, 마을마다 즐비한 황태덕장, 그리고 고랭지채소 덕분에 부촌으로 변한 도암면 횡계리에 있는 고개다. 강릉시 왕산면으로 넘나들던 옛 고갯길에는 희미하지만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동쪽 경사면 아래로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터널 입구가 보인다. 조금 더 멀리로는 닭목재에서 왕산천을 따라 강릉으로 연결되는 137번 지방도로와 왕산리 농가들이 관찰된다. 이곳 농가들은 버섯을 많이 재배한다.


새로 생긴 영동고속도로가 밑으로 지나간다. 이름은 대관령 1터널. 여기 말고도 대진고속도로 장계-서상 구간, 민령 하부로 지나가는 터널을 육십령터널이라고 이름지었다.


[행운의 돌탑]
우리 선조들이 험한 눈길을 지날 때마다 길에 흩어진 돌을 하나씩 주워다 자연스럽게 쌓은 탑으로 이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행운과 안녕을 기원하며 행운의 돌탑을 세웠다 한다


[능경봉] 陵京峰 1123.2m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및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에 걸쳐 있는 산. 백두대간이 동해를 끼고 설악산과 오대산, 황병산을 일으키고, 대관령에서 몸을 낮췄다가 다시 솟아오른 산이 능경봉이다. 대관령 남쪽 산맥 중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제왕산의 모산이다. 겨울철에는 무릎이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나, 대관령 줄기의 다른 산에 비해 산행거리가 짧아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눈덮힌 겨울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 봉으로 가는 길은 대관령에서 출발하는 짧은 등산로와 닭목재에서 가는 긴 등산로가 있다. 특히 대관령에서 출발하는 등산로는 산행거리가 짧아서 가족 단위 등산로로 안성맞춤이다.


與地圖書=강릉부 산천조에 소우음산(所于音山)부의 서쪽 팔십리에 있는데 산중에 샘이 있어 가물면 비를 빌어 영험이 있다. 대관령 남쪽에서 제일높다] 강릉시 왕산면-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에 위치한 능경봉은 능정봉(凌頂峰)또는 소우음산으로 대관령 정남으로 제일 높고 영험한 샘이 있어 기우제를 모시었고 맑은 날에는 울릉도도 보인다. 능정(凌頂)이 능경(凌頃)으로 변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왕산의 모산으로 오르기가 다소 힘드나 찾는이가 적어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산이다. 백두대간이 동해를 끼고 설악산(1708)과 오대산(1563), 황병산(1407)을 일으키고, 대관령에서 몸을 낮췄다가 다시 솟아오른 산이 능경봉이다. 겨울철에는 무릎이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나,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눈덮힌 겨울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능경봉 산행 들머리는 해발 850m가 넘는 대관령 고개마루인 대관령 남쪽휴게소에서 시작된다. 대관령에는 고갯길을 내고 두 번씩이나 죽음을 당한 고형산(高荊山)이라는 사람 얘기가 유명하다. 본래 대관령 고갯길은 오솔길이었으나, 이 고갯길을 조선시대 중종때 고형산이라는 사람이 사재를 털어 수개월 간에 걸쳐 우마차가 다닐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따라서 강릉과 한양간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대관령] 832m
강원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 고개의 총연장이 13 km나 되며,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과 영동을 잇는 관문이며,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한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오십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이 된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발왕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평탄면 지형을 이룬다. 기후는 한랭 다우지역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서리가 내리는 지역이다. 특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스키장이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이다. 연평균 기온은 6.1 ℃, 연강수량은 1,450 mm이다. 고랭지 채소 및 씨감자의 주산지이며 목축업이 발달해 있다. 산 정상에 서면 대관령의 광활한 초원과 강릉의 맑은 동해바다,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세와 마주할 수 있다.


아흔아홉 험준한 고개를 오르내리며 대굴대굴 굴러 대굴 령이라 하였으나 음절 되어 대관령이라, 또한 영서-영동 영동-영서를 넘나드는 큰관문이라 대관령이라 불리게 되었단다. 고개정상에는 대형 석비 대관령 현판, 신사임당 시비, 영동고속도로 완공 기념 조형물이 있다.


1) 석비에는 신사임당이 친정을 그리는思親詩가 오고가는 길손에 감동을 주고 있으니“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을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2) 영동고속도로 준공비: 박정희대통령영단으로 경인, 경부, 호남, 남해 노선을 완공하였고 오늘로서 영동 및 동해노선을 완공하여(중략).. 1975년 10월 1일


-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祠)
푯돌의 뒷면에는 '강릉단오제'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해마다 봄날이면 무려 한달 보름이나 이어진다는 강릉단오제. 일찍이 강릉의 소설가 허균(1569~1618)은 "해마다 오월이면 대령의 신을 모셔다가 갖은 놀이로 기쁘게 해드린다"[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 藁)]고 단오제를 글로 남겼다.


강릉은 본래 무천이라는 제사를 지내던 동예의 땅이다. 무천이 시월 상달에 올리는 추수감사제라면 단오제는 모내기를 끝낸 뒤에 곡식의 파종과 성장을 기원하는 잔치다. 온갖 씨앗을 잉태한 대지의 신들에게 바치는 생명의 축제. 강릉단오제는 그 연원을 모를 정도로 내력이 오래 되었다고 한다. 제사의 쉰은 대관령의 국사서낭신(범일국사[810~889년. 신라의 고승으로, 15세에 중이 되어 당나라에 유학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강릉 굴산사에서 40여년을 주석하며 사굴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처녀가 표주박에 담긴 해를 마시고 낳았다는 탄생설화, 왜구가 침략할 적마다 대관령에 올라 술법으로 물리치는 등 강릉 지방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구전된다.


대관령국사성황사는 죽은 뒤에 강릉과 영동 지방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범일국사를 서낭신으로 모신다.]과 산신(김유신[허균의 「성소부부고」에 "그는 어려서 이곳에 와 수련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쳤고, 그의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만에 완성되어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이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평정했으며 죽어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강릉 시내에 있는 국사여서낭신(강릉의 처녀[옛날 강릉 남문동의 정씨 집안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정씨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그 집의 사위가 되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귀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 정씨의 딸은 대관령 서낭신의 시자인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서낭당에 가보니 정시의 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대관령 여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그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4월 15일이면 서낭신을 여서낭사에 모셔가 합위시키고 제사를 올렸다. 이 행사는 지금도 강릉단오제 기간중에 이루어진다.]이다. 음력 삼월 스무날이면 신주(神酒)를 빚는 일로 시작하여 단오가 지난 음력 오월 초이래까지 계속된다. 한편에선 왁자지껄 난장을 치고 단오굿과 풍어굿을 올린 뒤 관노가면극 같은 탈놀음도 곁들인다.


- 생명의 축제, 강릉단오제
가시머리에서 산굽이 하나를 돌아서면 이내 대관령 고갯마루다.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대관령 고갯마루는 널찍한 휴게소가 아래위로 자리잡아 늘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다. 본래 대령(大嶺)[『증보문헌비고』 「여지고」의 관방 편에, "지지(地誌)에 이르기를, '대관령은 강릉부 서쪽 40리에 있다. 산맥이 함경도의 검산(劍山)과 분수령에서부터 본도(本道)로 들어와서 철령, 추지령, 금강산이 되고, 또 금강산에서부터 미시파령, 설악산, 소동라령, 오대산을 거쳐 이 고개가 되는데 천여 리에 가로 뻗치었다. 『한지(漢志』에서 이른바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 고개는 모두 산등성이가 길이 열린 곳과 서로 이어졌는데 이 고개가 더욱 험준하여 그 높이가 30리나 된다. 옛날에는 관방(關防)을 두고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강릉의 여러 고을을 관동이라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개 아래에서부터 산 허리로 구불구불 이어져 모두 50여 구비를 거쳐 관방에 도달한다'하여싸."고 실려 있다.]이라 하여 아흔아홉 구비[정확한 헤아림이 아니라 다만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말이다.]가 세상을 영동과 영서로 갈랐다. 내륙과 해안이 서로 만나 발길을 멈추는 곳이다.


- 대관령 개척의 선구자, 고형산
강릉대 교수 장정룡이 쓴 『대관령문화사』(동해안발전연구회, 1996)는 대관령의 역사와 개척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그의 글에 따르면, '중종 6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민력을 동원하지 않고 몇 달만에 대관령을 개척하여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청군이 이 길로 한양을 쉽게 침범하였으므로 인조가 대노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고 이른바 부관참시했다'는 종래의 전설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고형산은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축출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훗날 그의 부관참시는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뿌리를 둔 사건일 뿐, 대관령 개척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병자호란의 공간적 배경과 대관령 역시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어려웠던 시절에 도로를 개척한 공로를 일관되게 부정적 측면으로 폄하한 이유 또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고형산이 대관령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장정룡의 글은, 고형산을 대관령 개척으로 동서 교류의 새 역사를 이룩한 인물로 결론짓는다.


[선자령] 仙子嶺 1157m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우뚝 솟아 있다. 산 이름을 '산'이나 '봉'이 아닌 선자령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기록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경표(山經表)〉에는 '대관산(大關山)'이라 하고.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그 아래 보현사의 이름에 따라 '보현산(普賢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太古寺法)〉에는 '만월산(滿月山)'으로 적혀 있다.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자령은 해발 840m인 대관령의 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대관령에서 약 6km밖에 되지 않아 산행이 힘들지 않고 겨울철 적설 등반지로 적합하다. 대관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오솔길이었으나, 이 고갯길을 조선조 중종때 이 지방 사람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따라서 거의 평지길이나 다름없는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되므로 산길은 매우 완만하다. 이 능선길은 적설기와 신록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적설기에는 많은 눈에 덮여 은세계를 이루어 황홀하고, 신록기에는 새로 자라난 연녹색의 초원에 야생화가 만발하여 화원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산의 봉우리는 "산","봉","대"로 불리고 고개는 "령","재","치","현"으로 불린다. 그런대 선자령은 산의 봉우리인데 "령"으로 이름지어져 있다. 이 지역의 지형이 완만하고 다른 길과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 같다. 정상석의 뒷쪽을 보면 선자령은 옛날부터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을 있는 고갯길이었고, 대관산(산경표), 보현산(동국여지지도와 사탑고적고 기록), 만월산(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 기록으로,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됨)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선자령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선녀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와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선자령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나즈목이]
'낮은 목'. 강릉 사투리로 '안부'라는 뜻이다.


[곤신봉] 1127m
곤신봉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산. 등산로 주변에는 문화재 자료 제 37호인 보현사 대웅전이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544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공산성은 지방기념물 제 28호로 1979. 5. 30 지정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54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일명 보현산성, 대궁산성으로 불린다. 태백산맥에서 동쪽으로 돌출한 보현산(해발 944m)에 쌓았다.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 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축조하였다고도 하고, 발해의 왕인 대씨(大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쌓았다고 하여 대공산성이라 불린다고도 하나 명확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한말 을미의병 때에는 민용호가 이끄는 의병이 이 곳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산성의 총 길이는 약 4㎞ 정도이며, 성벽은 크기가 다양한 성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는데, 높이 2.3m~2.5m 정도 된다. 동 벽의 일부는 순수한 토성이며 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밖으로 돌출해 쌓는 치성(雉城)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성안에는 건물 터와 우물터, 성문터 등이 남아 있고, 토기 조각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봉] 1173m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경계에 있는 높이 1,173m의 사천면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옛날 미데기(바닷물)가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 매 한 마리가 겨우 앉을 자리만 남기고 이 봉 꼭대기까지 바닷물이 가득찼다고 해서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대간 능선을 경계로 하는 드넓은 목장은 매봉을 지나면서도 계속된다. 정상 부근에는 기상관측 시설이 있다. 독수리의 둥지가 있었거나 봉우리가 독수리의 형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모양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런 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목초지 개발과정에서 평탄 작업을 하고 주변에 키 큰 나무도 모두 뽑혀나가는 등 이름 붙여진 때와는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황병산]
정상은 대관령목장의 초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표지석과 함께 안내판이 서 있다. 황병산 정상은 대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황병산은 '누른(黃) 자루(柄)'처럼 길다랗게 생긴 산이라 붙여졌다. 소황병산은 황병산과 산허리를 맞대고 있어 같은 산이지만 높이가 조금 낮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청학동 소금강 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지만 내륙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고산 구릉지대다.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 완만한 구릉지를 모두 목장용 초지로 개발하여 지금은 수천 두의 소를 방목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목장이 되었다. 삼양식품 대관령목장과 한일목장, 그리고 농촌진흥청의 고랭지 시험장의 경작지도 이 지역에 있다. 소황병산 산에 서면 이후에 밟아야 할 매봉과 곤신봉, 선자령 등 대간 봉우리들이 시계방향으로 펼쳐지고 그 안에 드넓은 목초지가 그 주변 횡계리의 시골풍경도 아스라하게 내려다보인다.


[노인봉] 老人峰 1338m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및 평창군 도암면에 걸쳐 있는 산. 오대산국립공원권에 속하는 산으로 황병산과 오대산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산자락에 소금강 계곡을 거느리고 있다. 소금강은 1970년 우리나라 명승1호로 지정되었다. 일부에서는 연곡 소금강, 오대산 소금강, 청학동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일컫는 '소금강'이란 이름은 율곡 이이가 청학동을 탐방하고 쓴 《청학산기》에서 유래되었으며 무릉계곡 바위에 아직 '소금강'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낙영폭포·만물상·구룡폭포·무릉계로 이어진다. 산의 정상에는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산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에서 발원한 청학천이 13km를 흘러내리며 이룬 소금강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소와 담, 폭포 등 30여 개가 넘는 경관지를 빚어냈는데 특히 금강산의 그것과 흡사한 만물상·구룡연·상팔담 등이 볼 만하다.


(일설에는 노인봉이 높아 정상에 오르면, 그 일대의 모든 것이 어리게 보인다 하여 노인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심마니 선잠에 노인이 나타나 부근에 무밭에서 무를 캐라 하기에 일러준 대로 가보니 무 대신 산삼 밭이라 이 곳 봉우리를 노인봉이라 불렀다 한다)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서 산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는 전설이 있어 노인봉이라 하였다.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마음이 착한 심마니가 산삼을 캐러 노인봉에 왔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더니 '이 근처에 무밭이 있으니 거기 가서 무를 캐거라.' 하고 일러 주었다. 꿈에서 깬 심마니는 꿈이 하도 생생하고 신기하여 노인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정말로 그 곳에는 오래된 산삼 수십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진고개]
주문진과 하진부의 경계다. 2차선 포장도로인 6번 국도가 고갯마루 끊고 넘어간다. 대관령의 보조역으로 개설된 도로이며, 강릉 이북의 해안지역에서는 이 길을 이용해 내륙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리가 가깝다. 정상에는 국립공원 매표소가 있고, 산장과 휴게소도 운영된다. '긴(長) 고개'가 소리 변형되어 '진고개'가 되었다. '장현' 또는 '이현'이라고도 불렀다. 이 도로의 해안 쪽은 연곡천을 따라 내려가는데 주변경관이 뛰어나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소개한 책도 많다. 도로 주변에 토속음식점이 여럿이다.


[동대산] 東臺山 1434m
강원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산으로, 북쪽의 두로봉(頭老峰), 북서쪽의 비로봉(毘盧峰) ·상왕봉(象王峰), 서쪽의 서대산(西臺山) ·호령봉(虎嶺峰), 동쪽의 노인봉(老人峰) 등과 함께 태백산령의 줄기를 이루는 오대산령 안에 솟아 있다. 이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평창강(平昌江)의 발원지를 이루고 있다.


계곡과 짙은 수림에 유서 깊은 월정사(月精寺)를 비롯하여 상원사(上院寺)·관음암(觀音庵) 등이 있으며, 1975년 2월에 지정된 오대산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된 데 힘입어 관광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또 최근 관광·등산객이 늘어나면서 오대산과 노인봉을 잇는 등산로가 있다


[신선목이]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의하면, 자장 이후 그 신앙사상을 계승하여 오대산 신성굴(神聖窟)과 울진국(경북 울진군) 장천굴(掌天窟=聖留窟)에서 수도하여 성도한 신라 정신대왕(신문왕)의 태자 보천은 신성으로 일컬어질 만큼 신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로 보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보천태자가 신통력을 발휘해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기 보다는 그의 도력이 높아지고 수차력(水借力)에 의한 경신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축지법도 행할 수 있는 고도의 수행 경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성굴은 송광연(1638-1695), 김창흡(金昌翕·1653-1722),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현 두로봉 남쪽 골짜기인 신선골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곡가 왼쪽 산기슭에 있었던 굴로 추정된다. 김창흡은 '(상원사 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다른 시내가 흘러와 모이는데, 그것을 살펴보니 제법 맑고 그윽하였다. 그 골짜기를 뚫고 가면 양양의 부연동 계곡에 이른다고 한다. 그 곁에 신성굴이 있는데, 옛날 명승이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터가 폐지되었다'고 했다.


신성굴이 있는 계곡은 곧 오늘날의 신선골로서, 이 계곡으로 들어가 백두대간 주능선 상의 신선목을 넘어 양양(현재는 강릉시 연곡면)의 부연동계곡으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선골은 곧 신성골이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선골 입구에는 현재도 보천태자의 수행정신을 계승하고자 신성암(神聖庵)이란 건물을 지어놓고 수도처로 삼고 있다.


신선목이는 이 신선골에서 따온 지명으로 보인다.


[두로봉] 頭老峰 1422m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珍富面)과 홍천군 내면(內面) 및 강릉시 연곡면(連谷面)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422m. 북서쪽의 비로봉(毘盧峰)·상왕봉(象王峰), 서쪽의 호령봉(虎嶺峰), 남동쪽의 동대산(東臺山) 등과 함께 오대산령 중에 솟아 있는 고봉이다.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홍천강의 발원지를 이룬다. 상원사(上院寺)와 미륵암은 계곡과 더불어 명승지를 이루는데,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산봉우리가 노인의 머리처럼 생겼다 함.


- 頭(두)관련 이름에 관하여...
두류산, 두루봉, 두리봉, 두로봉, 두량산, 두룡봉 등..


이 산의 특징을 보면 산봉우리가 둥그렇고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다. 아니면 어느 터를 둥글게 울타리 치듯 둘러싸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두렵고'는 '둥글고'의 옛말이고, 이 말에서 '두리'(둘레)라는 말이 나왔다. 두리목(둥근 제목) 두리반(두레상) 두리새암(우물의 사투리) 두리 함지박(둥근 함지박) 돌려가며 돕는다는 뜻의 두레도 생겨났다.


[두로령] 1310m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진부면의 경계. 비포장도로이지만 명색이 446번 지방도.


[신배령] 新梨嶺 1173m
신배령은 연곡면 삼산 3리와 홍천군 내면 조개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예부터 맛이 신 돌배가 많이 자생하여 신배령이라 불리운다.


이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니 갑오농민항쟁의 피어린 역사가 되새겨진다.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였던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차기석은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함께 1893년의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고,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홍천군 서석지방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한강기맥의 구간 구분지점인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쪽으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다. 토벌군은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을 넘어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을 장악하고 협공했고,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생포 당하고 강릉으로 압송되어 효수 당했다.


농민군 수천명 조직 '反봉건·침략' 항쟁
  1894년 갑오농민항쟁은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으로, 봉건제를 타도하여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반식민지 사회로의 길에서 이탈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즉, 그 이전까지 진행되어가던 봉건제 해체의 과정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 의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강화되자 봉건지배층과 피지배농민층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됨으로써 폭발한 농민항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자주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열고자 한 내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갑오농민항쟁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894년 농민항쟁에서 보여준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영웅적인 반침략 반봉건투쟁은 봉건지배층과 일본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애국적 기개와 민족적 단결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특히 군사적으로 우세한 일본 침략자에게 맞서 총알이 비 오듯이 퍼붓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했던 농민군들의 용감성과 희생정신은 그 후 우리 민족의 반침략 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갑오농민항쟁에서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서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강원도 지역에도 일찍이 동학이 포교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제우에 의해서 홍천 북방면 지역에서 포교활동이 있었고,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곧은골 지역에도 동학당이 설치되어 몰래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또 최제우가 체포되고 동학이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강원도로 피해 온 많은 동학교도들에 의하여 강원도 각지에도 널리 동학이 포교되었다.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동학의 조직과 활동이 어떠했는지 잘 드러나지 않으나 홍천대접주 차기석이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로 불리워지던 차기석은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그는 9월 말경에 군대를 일으켜 창고를 불지르고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모아, 포목·어곽·화우(貨羽) 등 상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물자를 충당하는 등 세력을 모았다.


  한편 내면에서 가까운 봉평면에서도 차기석의 영향아래 윤태열·정창해·조원중·정헌심 등이 백성을 결집하여 군대를 이루어 창사 곁에 목책을 세우고 각 촌락의 집집마다 좁쌀 6말과 미투리 1쌍씩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농민항쟁을 준비한 차기석은 박종백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10월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동창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중요한 사창으로, 세곡을 거둬 보관해 두었다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뗏목에 실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보내던 곳이었다.


  동창을 치고 보은 장내로 향하던 차기석은 동창이 농민군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경기도에서 홍천으로 들어온 농민군 토벌대 지평현감 맹영재와 10월 21일 장야평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장비의 열세로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서석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10월 22일 홍천 서석 풍암리 진등위에 진을 친 차기석은 농민군을 이끌고 맹영재의 토벌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토벌군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기도 일대에서 농민군 토벌에 맹위를 떨치고 있던 맹영재와 접전을 벌인 차기석의 농민군은 많은 희생은 치르었다. 이 날 희생당한 농민군과 동네사람들의 수는 800여명에서 1,00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있는 `자작고개'라는 이름도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해서, 또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농민군들을 묻은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잦아진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자작고개를 중심으로 진퇴를 거듭하며 토벌대에 맞섰던 차기석은 홍천군 내면으로 퇴각하여 다시 세를 모으기 위해 기린·양양·간성의 농민군에게 봉평을 치자는 통 문을 보내었다. 그러자 봉평의 농민군을 토벌한 포군대장 강위서가 11월 6일 토벌군을 이끌고 내면 1리로 들어왔다.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차기석은 산위에 매복해 있다가 밤중에 강위서 토벌대를 습격하여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강위서의 포군 부대는 8명의 부상자를 이끌고 패배한 채 내면에서 쫓겨났고, 그 후 전열을 정비한 토벌군은 각 지역의 관군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사방에서 농민군을 조여들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계방산과 오대산 기슭의 자운리, 흥정리와 계방천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잡은 원당리·청두리·약수포 등지에서 차기석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농민군을 이끌고 토벌군을 맞아 치열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청두리에서 약수포까지는 토벌군도 70리를 벽을 기어오르며 전진하였다고 할 정도로 험난한 곳이다. 이 계곡은 구룡령에서 오대산 두루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이루어 양양·강릉의 영동과의 경계선이 되며, 그 사이에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이 놓여있다. 잎이 무성한 계절이라면 험난한 이곳 지형이 유격투쟁을 벌이기 적합할 것이나 활엽수의 잎이 모두 지고 눈이 쌓이기 시작한 11월 중순이어서 사방에서 협공하는 토벌군을 맞아 농민군이 싸우기에는 매우 불리하였다.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이 토벌군에게 장악된 상태에서 협공을 당한 농민군은 토벌군 뿐 아니라 지형에도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11월 11일, 내면 자운의 농민군은 보래령을 넘어온 봉평 포군대장 강위서와 60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합세한 홍천의 허경의 공격을 받아 접주 위승국 형제와 접사 심성숙, 박군오, 정창호 등 17명이 포살 되었다.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12일, 운두령을 넘어온 강릉의 박동의와 양양의 이석범이 이끄는 토벌군의 협공을 받아 생포되었다. 이때 성찰 오덕현, 집강 박성원, 지덕화 3인은 포살 당했다.


  13일에는 내면 청두리에서 홍천의 농민군 지도자 권성오, 권수청 등 12명이 포살 당하였다. 약수포 쪽으로 쫓겨간 500여 명의 농민군은 청두리 쪽에서 추격한 토벌대와 신배령을 넘어온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 응봉령을 넘어 온 이석범의 부종 김익제의 토벌군에게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여 접주 김치실 등 11명이 포살 당하고 접사 박학조는 생포되었다. 농민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3처의 별당과 37채의 집도 불태워졌다. 자운·흥정·신흥 등의 농민군도 강위서가 이끄는 토벌군에 밀리면서 임정호 등 38명이 포살 당했다.


  차기석은 생포된 뒤 강릉으로 압송되어 11월 22일 박학조와 함께 강릉 교장에서 효수 당하므로 일생을 마쳤다. 강원동학군의 지도자인 차기석이 이끌던 동학혁명군의 전투는 강원동학혁명군 전투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엄찬호(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문학박사)


[1210.1봉]
강릉시, 양양군, 홍천군이 함께하는 경계지점이다.


[만월봉] 滿月峰 1280.9m
약200년전 조선조 말 어느 시인이 이 봉을 바라보고 시를 읊었는데 시중에 바다에 솟은 달이 온산에 비침으로 만월이 가득하다 하여 만월봉이라 한다.


- 소양강, 강원도 인제군과 춘천시를 남서류하는 강
길이 169.75㎞. 한강의 제2지류이며, 북한강의 제1지류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 만월봉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며 계방천이라 불리다가 척천천·자운천·방대천 등을 합류하고 내린천이라 불린다.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서 서화천이 흘러들며, 소양호를 이룬 뒤 춘천시 우두동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 건설된 소양강 댐은 다목적 댐이며,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서 인제읍까지 배가 운항하여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의 교통로뿐만 아니라 설악산국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유역 내에는 대승폭포·12선녀탕계곡·구성폭포·용소폭포·쌍룡폭포·황장폭포 등의 폭포와 백담사·청평사·봉정암·오세암·영시암 등의 명승 사찰이 있다.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이며, 강에는 어름치·열목이 등의 냉수성 어종을 비롯하여 쏘가리·뱀장어·메기·붕어·잉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인제읍 합강리에서 뗏목을 타고 소양강, 북한강, 한강 본류를 따라 서울의 노량진까지 내려오면서 부른 〈합강리 뗏목아리랑〉이 전한다.


[통마름]
겨울이면 계곡을 따라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통바람'이라고 했던 것이 '통마름'이란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통바람'이라고 부른다.


통바람골 :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붙여진 이름은 홍천군 내면 명개리 3반. 자연부락명은 통바람골이다. 명개리 본마을과는 숲으로 격리된 상태로 무려 10리 길이나 떨어져 있어 전혀 다른 마을같다. 원래는 양양군 서면에 포함됐으나 1916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현재의 행정구역이 됐다. 3년전에 전기가 들어와 산속이 갑자기 대명천지의 혜택을 누리고는 있지만 아직 전화는 들어오지 않았다. 지천의 나무때문인지 땔나무가 주연료며 여름에도 추워서 불을 때고 자야할만큼 하늘이 손끝에 닿을듯 깊은 산속 높은 마을이다. 해발로는 900m이다. 오대산 후문쪽으로 이어지는 명개리 마을의 포장도로 중간쯤에서 마을 진입로는 시작된다. 옛날 임도를 조금 넓혀 작은 차량들이 간신히 드나들게 닦아 놓은 비탈 비포장길이 있다. 이 마을은 이런 오지를 입증하듯 슬픈 사연도 안고 있다. 이 계곡이 바로 남한으로 침투한 무장공비의 주요 퇴로라는 것이다.


1968년 김신조사건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 소개됐다가 몇년후 다시 들어와 사는 고난도 겪었다. 또 지난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때도 무장 군인들이 들어와 마을 지켰다.


(2004년 7월 29일 강원일보 김대중 기자)


[응복산] 鷹伏山 1369.8m
산의 모양이 매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매복산 또는 응복산이라고 함.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현북면, 홍천군 내면에 걸쳐 있는 산.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해당한다. 이 산에서 오대산 두로봉까지는 약 10km 정도로, 두로봉과 약수산·구룡령을 잇는 구간을 산행코스로 잡을 수도 있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한계령과 대관령의 중간에 있어 미천골·통마람골·약수골·합실골 등 사방에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산행은 명개리에서 구룡령을 넘어 갈천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포장됨에 따라 구룡령을 기점으로 하는 당일 산행이 가능해졌으나, 미천골을 따라 불바라기약수까지 다녀오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산행 시간은 구룡령에서 정상에 오른 뒤 통마람골을 따라 약수동까지 가는 데 7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에는 주목 한 그루만이 있어 전망이 좋다. 주변에 708년(신라 성덕왕 7)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水墮寺)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불소·칼슘 등이 들어 있어 만성위장병과 고혈압·빈혈·당뇨 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


'708년(신라 선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 불소, 칼슘 등이 들어있어 만성 위장병과 고혈압과 빈혈,당뇨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하며...'


[마늘봉]
약수산과 응복산의 한가운데 독립적인 하나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마늘처럼 동그랗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대간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몇 안되는 우리말 이름이다. 규모가 작은 봉우리인데도 별도의 이름을 가진 것이 의외다. 남쪽으로 오대산의 비로봉과 상왕봉, 호령봉, 계방산 등이 건너다보인다. 북쪽계곡 1.5Km 지점에 유명한 불바라기약수가 있지만 내려서는 길은 마땅치 않다. 응복산 방향으로 10분 거리에 평평한 야영장과 샘터가 있다.


[약수산] 1306m
약수산이란 이름은 흔히 명개리 약수라 불리는 이 산 남쪽 골짜기의 약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약수산의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淵源을 좇으니, 약수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에는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약수산과 갈전곡봉 사이 구룡령 계곡에는 갈천약수가 있다. 갈천이라는 이름은 칡뿌리로 허기를 달랠 때 냇가에 칡물이 떠날 날이 없다는 데서 유래했다. 「양양군지」에 함께 실린 오색약수에 눌려 늦게 알려졌지만, 양양 주민들은 이 약수를 더 쳐주는 편이란다. 예부터 내려온 갈천의 4가지 보물(葛川四寶)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약수인데 약수가 솟는 너럭바위 주변은 용출되는 철분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어 쇳물 맛이 많이 나는 편이며 톡 쏘는 맛이 강하단다. 성분은 철분,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칼륨, 망간 등으로 빈혈,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는데 주민들은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